성경토픽/절기묵상

고난주간 묵상, 마 26:69-75 베드로의 부인과 통회

케리그마 2025. 3. 3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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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다짐, 그러나 꺼지지 않는 불빛(마태복음 26:69-7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의 이 밤, 우리는 십자가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 서 있는 베드로를 바라봅니다. 겟세마네에서 검을 휘둘렀던 그 손, 목숨까지 내놓겠다던 그 고백은 지금 조용히 스러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신 그 순간,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거리이자 심장의 거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신문당하고 계셨고, 베드로는 바깥뜰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문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무너진 다짐의 현장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은혜를 마주하게 됩니다.

 

작은 불빛 앞에서 무너지는 큰 다짐(마 26:69-70)

대제사장의 뜰, 그 어두운 밤, 불을 쬐고 있는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바라봅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마 26:69). 그것은 위협이기보다는 질문이었고, 칼을 겨눈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모른다”라고 대답합니다. 그것도 공개적인 부인입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마 26:70).

베드로는 그날 아침, 목숨까지 내어놓겠다고 다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만에 그는 그 입술로 주님을 부인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도 종종 이와 같습니다. 고백은 웅장하나 시험 앞에서는 허망하게 무너지는 신앙, 그것이 인간의 본 모습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 베드로는 그 말씀을 믿지 않았지만,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두 번째 질문, 더 큰 부인(마 26:71-72)

베드로는 문간으로 나갑니다. 하지만 거기서 또 다른 여종이 그를 알아봅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마 26:71). 점점 그의 정체는 드러나고, 베드로는 점점 더 몰립니다. 이제는 단순한 부인을 넘어서, 맹세까지 하며 말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2).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맹세'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맹세는 자기 생명과 신을 걸고 하는 최후의 확증이었습니다. 즉, 베드로는 이제 자기 신앙의 토대를 무너뜨리며,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두려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란 언제나 두려움과 마주해야 하는 싸움입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고백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세상의 시선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믿음을 움켜쥐려다가 놓쳐버립니다. 베드로는 지금 두려움의 그늘 아래 있습니다. 그 어둠은 단순히 밤의 어둠이 아니라, 믿음이 가려진 영혼의 어둠이었습니다.

세 번째 부인, 진실을 덮는 저주(마 26:73-74)

이제는 곁에 서 있던 이들이 다가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너는 분명히 그들과 한 패다. 네 말소리가 너를 드러낸다”(마 26:73). 사람의 억양, 말투, 태도는 감출 수 없는 정체를 말해줍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가릴 수 없는 증거 앞에서 절박하게 반응합니다.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4).

이 순간은 단순한 부인이 아닙니다. ‘저주하며’라는 표현은 원문상 ‘자기에게 저주를 불러오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화가 임해도 좋으니, 예수를 모른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깊은 절망입니까. 말의 칼끝이 믿음을 찌르고, 자신의 고백이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있습니다.

그러자 닭이 웁니다. 그 익숙한, 그러나 이번에는 심장을 조이는 듯한 울음. 마치 말씀 자체가 소리 되어 울리는 것처럼, 예수님의 예언이 그 순간 베드로의 귀에, 아니 가슴에 내려꽂힙니다. 말씀이 그를 무너뜨리고, 동시에 말씀이 그를 깨웁니다.

눈물의 회개, 하나님의 회복(마 26:75)

베드로는 즉시 주님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는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합니다(마 26:75). 여기서 '심히'라는 표현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영혼이 쏟아지는 듯한 탄식입니다. 눈물이 강을 이루고, 그 강물이 그를 주님께로 데려갑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슬픔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찔림입니다. 말씀 앞에 선 영혼이 경험하는 내적 무너짐입니다. 그리고 이 눈물은 회복의 시작이 됩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실수를 몰라서 택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실패를 아시면서도, 그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이 통곡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통곡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얼마나 자주 말로 주님을 부인합니까. 상황 때문에, 이익 때문에, 사람의 눈치 때문에. 그러나 우리가 울 수 있다면, 소망은 있습니다. 회개할 수 있다면, 그 길은 다시 이어집니다. 베드로는 울었고, 주님은 그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베드로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부인한 자에게, 세 번의 회복을 허락하신 주님의 사랑.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구속의 복음입니다.

마무리 묵상

이 밤, 우리도 베드로처럼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너짐은 끝이 아닙니다. 거기서 말씀을 기억할 수 있다면, 통곡할 수 있다면, 주님은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고난주간은 실패한 제자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그 실패를 품으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 물음 앞에, 우리도 다시 대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오늘, 다시 주님의 얼굴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며, 무너진 다짐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눈물로 다시 세워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눈물이 주님 앞에서 헛되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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