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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에서 말하는 '어린이'의 성경 신학적 의미

케리그마 2025.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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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에서 말하는 '어린이'의 의미

성경에서 어린이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순수함? 어리석음? 정말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다양한 어린이에 대한 주제를 주제별로 나누어 생각해 보렵고 합니다. 어린이 주일 설교나 신학적으로 접근할 때 안내서와 같은 역할을 하리라 믿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어린이 (창세기 17:10-12, 신명기 6:7)

  •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어린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역사 속에서 특별한 상징성과 신학적 위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어린이를 바라보시며, 어떤 메시지를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지에 대한 통전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어린이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상징이며, 언약 공동체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구약에서는 자녀들이 언약의 계승자로 간주되어, 할례와 율법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라야 할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어린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역사 속에서 특별한 상징성과 신학적 위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어린이’라는 주제는 구약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며, 신약으로도 이어지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한 사람과의 약속이 아닌, 그의 후손과 대대에 이르는 지속적 언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세기 17:10). 이 말씀은 언약의 표지로서의 할례가 단지 성인의 참여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지 8일 된 남자아이들에게까지 적용됨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창세기 17:12).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어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아기에게도 자신의 언약을 확장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를 단지 보호의 대상이나 미래의 가능성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현재적 존재’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시선 안에서는 연령이나 능력이 언약 백성의 자격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이 먼저이며, 그분의 언약은 어린 생명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또한 신명기 6장 7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씀을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이든지 길을 갈 때이든지 눕든지 일어날 때이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명기 6:7). 이 명령은 단지 가정 교육의 윤리적 원리가 아닙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삶의 방식이며, 말씀 중심의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다음 세대로 전해지도록 하는 ‘신학적 책임’입니다.

 

특히 히브리어에서 “가르치다”라는 단어는 반복적으로 새기고, 뚜렷하게 각인시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는 단순히 암송을 넘어, 말씀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정신을 심는 교육을 뜻합니다. 이로써 어린이는 단지 배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자라나며, 결국 그 말씀의 약속을 계승하고 실현하는 주체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혈통과 전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신앙의 전승을 통해 유기적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린이는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연결 고리이자,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의 일부로 포함됩니다.

이 신학적 인식은 신약에서도 암묵적으로 지속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14절에서 믿는 부모로 인해 자녀가 ‘거룩하게’ 된다고 말하며, 언약 공동체 안에서 자녀의 영적 지위에 대해 강조합니다. 이는 구약의 언약사상이 신약 교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은 단절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문을 넘어, 시대를 넘어, 한 어린 생명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확장됩니다. 교회와 가정은 이 언약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매개체로 부름받았으며, 우리는 그 소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어린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현재적 주체이며, 언약 공동체의 귀한 구성원입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연약함과 의존성의 상징으로서의 어린이 (시편 131:2, 이사야 11:8)

  • 어린이는 연약함과 의존성의 상징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 태도를 대표합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을 젖댄 아이에 비유하며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의탁을 고백하고, 이사야는 메시아의 나라에서 어린이가 안전하게 살아가는 평화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어린이는 단순히 연령적으로 미성숙한 존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특히 시편과 예언서에서 나타나는 어린이의 이미지는 ‘연약함’과 ‘의존성’이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상징성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성찰하게 하며,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통찰하도록 돕습니다.

 

시편 131편 2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 구절은 다윗의 시로 알려져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겸손과 신뢰를 아름다운 시적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젖 뗀 아이’는 단지 유아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모든 것을 의지하며,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바로 그 모습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보는 방식입니다.

 

이 시편은 인간의 교만함과 자기 확신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신앙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젖 뗀 아이’는 불안하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보호자의 품 안에서 평온하게 안식합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성도의 태도는 능력 있는 자로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보호자를 의지하는 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사야 11장 8절 역시 어린이를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이 말씀은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 왕국의 평화와 회복에 대한 장면 중 일부입니다. 여기서 ‘젖먹는 아이’와 ‘젖 뗀 어린 아이’는 자연의 위험을 인식할 능력도, 방어할 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연약한 아이들이 두려움 없이 독사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메시아 왕국의 특징이 완전한 평화와 안전임을 상징합니다.

 

이사야는 이 장면을 통해 에덴 동산의 회복, 곧 창조 질서가 완전히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시각적으로 묘사합니다. 인간과 동물, 강자와 약자 사이의 긴장이 사라진 그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인 아이가 중심에 등장하는 것은 단순한 평화의 이미지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약자의 안식처이며, 전적인 의존 속에서도 완전한 보호와 자유가 주어지는 장소임을 보여주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이 두 본문은 공통적으로 어린이를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존재’, 곧 철저히 타자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상태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의존성 속에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보다, 자기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이 점에서 어린이는 단지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신앙의 거울입니다.

 

결국 연약함과 의존성은 성경 속에서 어린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추는 거울로 사용됩니다.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그것이 곧 천국을 소유하는 방식입니다. 어린이를 통해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겸손함을 배우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의 본질을 다시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어린이 (마태복음 18:3, 마가복음 10:14)

  •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보셨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순수하고 겸손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안고 축복하시며, 그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어린이의 존재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반영한다는 깊은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어린이 (마태복음 18:3, 마가복음 10:14)

성경에서 어린이는 단지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존재를 넘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모형으로 제시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주제입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과 마가복음 10장 14절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를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자 거울로 삼으시며, 이를 통해 천국 백성의 자격과 성품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먼저 마태복음 18장 3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단지 어린이를 사랑하라는 정도의 권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될 것’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은 순진무구함을 가장한 미성숙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겸손, 신뢰, 자기부인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자신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른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고, 스스로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니라 보호자의 손길을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신앙 태도도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거나, 자기 의지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도우심에 의지하는 자세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4절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자 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예수님의 이 반응은 단호합니다. 당시 문화적 배경에서는 아이들이 성인 남성이나 라삐와 같은 지도자에게 접근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통념을 정면으로 깨뜨리시며, 어린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가 강자나 지혜로운 자, 완벽한 자의 것이 아니라, 의존적이고 순전한 자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 나아오려는 아이들을 막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문을 막는 행위와 같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어린이들이 복음 앞으로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그들을 환영해야 합니다. 그들을 방해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린이는 단지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제 모델입니다. 어른들이 오히려 어린이를 통해 배워야 하며, 그들의 순전함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질서를 이해해야 합니다. 어린이의 존재 방식은 하나님의 나라가 추구하는 가치를 반영합니다. 그것은 겸손, 신뢰, 수용,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결국 어린이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 있는 비유로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안고 축복하셨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복음의 메시지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이들을 통해 천국을 배우고, 그들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깊이를 체험해야 합니다.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제자도의 본보기로서의 어린이 (마태복음 18:4, 잠언 22:6, 누가복음 2장)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낮추고 어린아이와 같이 될 것을 명하셨습니다. 어린이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보호자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겸손의 모델입니다. 잠언은 자녀를 훈계하라고 강조하며,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대화하는 소년 예수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어린이는 신앙의 주체이자 교육의 대상이며,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큰 자가 누구인지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며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8:4). 이 장면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제자도로 부름받은 이들이 가져야 할 본질적인 성품을 어린이의 모습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린이는 권리도, 사회적 영향력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오직 부모나 어른들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는,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어린이를 예수님은 천국에서 ‘큰 자’의 모델로 삼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단순한 겸손을 넘어서, 자기 권리와 자존심, 명예와 성취를 내려놓는 자기비움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곧 어린이는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 자체로 제자도의 핵심을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제자도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 삶은 능력 중심의 경쟁이 아니라, 사랑과 순종, 겸손과 희생으로 드러납니다. 어린이는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기꺼이 보호자를 따릅니다. 그 태도가 바로 참된 제자의 모습이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잠언 22장 6절은 자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단지 교육의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자녀가 인생 전체에 걸쳐 따라가야 할 ‘길’, 즉 믿음의 길,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삶의 방향을 설정해주는 영적 나침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세워주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배우고, 순종의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부모와 공동체가 함께 감당해야 할 거룩한 사명입니다. 결국 그런 아이들이 자라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곧 열두 살 때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말씀을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이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누가복음 2:46–47).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이미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열정을 품고 계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는 모든 어린이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신앙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은 자라나는 어린이가 결코 수동적인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하고 탐구하며 자라나는 능동적 제자임을 드러냅니다. 아이들은 작은 제자이며,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안에서 훈련되고 사용될 수 있는 주체적 존재들입니다.

 

결론적으로, 어린이는 단지 교회의 ‘미래’가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제자도를 살아낼 수 있는 귀한 존재이며, 그들의 겸손과 순종, 열린 마음은 어른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셨듯, 교회는 늘 그 중심에 어린이를 두고, 그들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다시 배우고 확인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마무리

어린이는 단순한 보호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며, 하나님 나라의 거울이자 제자의 본보기입니다. 성경은 어린이를 단지 연령상으로만 규정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존귀한 존재로 드러냅니다. 교회는 어린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체로 세워야 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품으셨던 어린아이처럼, 우리도 그들을 품을 때 하나님의 사랑과 나라를 더 깊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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