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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묵상, 고전 11:23-26, 성만찬 제정

케리그마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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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 그리고 전하라 – 떡과 잔에 담긴 십자가의 서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의 성목요일 밤, 우리는 한 말씀 앞에 조용히 서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절에서 26절까지, 이 짧은 구절은 기독교 신앙의 심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본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며, 또한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를 선포합니다.

이 본문은 단지 성찬에 대한 실천적 지침이 아닙니다. 이것은 떡과 잔 속에 숨겨진 십자가의 깊은 고백이며, 동시에 고난주간의 흐름 속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 것은 한 끼의 종교적 행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피 묻은 사랑을 몸으로 기억하고, 부활의 소망을 입술로 증언하는 성도의 순례 행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고전 11:23)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고전 11:23). 그는 자신이 이 성찬의 진리를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주님께 직접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며, 십자가의 진실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그 밤’—잡히시던 밤이라는 표현은, 성찬이 주어졌던 상황의 긴박함과 고통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앞두고, 떡을 들고 잔을 드셨습니다. 배신과 부인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 밤에, 예수님은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희망이 아닌 절망의 밤에, 주님은 생명의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사랑의 등불,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고전 11: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고전 11:24). 떡을 떼는 이 행위는 단순한 나눔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찢겨질 예수님의 몸을 미리 보여주는 상징적 행동입니다. 떡이 손에서 조용히 찢길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살이 채찍에 맞고 못에 박히는 고통을 기억하게 됩니다.

"너희를 위하는 내 몸." 이 한 구절이 모든 설교를 멈추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없는 낮아짐이며, 궁극의 헌신입니다. 고난주간은 바로 이 고백 앞에 멈춰 서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누구를 위해 몸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기념하라는 말은 단순히 ‘생각나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아남네시스’라는 단어는, 그 사건을 현재 속에 불러와 실현하라는 뜻입니다. 곧 성찬은 기억의 재현이며, 십자가를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살아내는 영적 사건입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고전 11:25)

이어서 잔을 드시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5). 구약 시대, 언약은 반드시 피로 맺어졌습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도, 시내산의 언약도, 희생 제물의 피 없이는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새로운 언약을 세우십니다.

여기서 ‘새 언약’이라는 표현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과 연결됩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그리고 그 언약은 더 이상 돌판에 쓰이지 않고, 마음판에 새겨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단지 용서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약속이며 관계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담긴 이 잔은 한계 없는 용서, 끝없는 자비, 영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그 잔을 마시며 고백합니다. “나는 이 피 없이는 설 수 없는 자입니다. 나는 그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자입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전 11:26)

마지막 구절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성찬은 고백이자 선포입니다. 우리는 떡과 잔을 통해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동시에, 그 죽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존재가 됩니다.

‘전한다’는 말은 단지 말로 알리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찬을 받은 자는 이제 십자가를 짊어진 자입니다. 고난주간은 단지 묵상하는 시간이 아니라, 십자가를 들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떡을 먹는다는 것은, 이제 그 몸을 이 세상 속에 드러내는 일에 동참한다는 뜻이고, 잔을 마신다는 것은, 주님의 피가 흐르는 생명의 통로가 되겠다는 결단입니다.

주의 죽으심을 전한다는 것은 단지 성찬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말과 행동과 관계와 시간 속에서, 예수님의 희생을 계속해서 살아내는 삶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삶으로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그것이 성찬의 사람, 고난주간의 사람입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의 짧은 네 절 말씀 앞에서 고난주간의 깊이를 다시 마주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찢기셨고, 그 피는 흘러졌으며, 우리는 그 떡을 먹고 그 잔을 마심으로 그 사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성찬은 기억입니다. 그러나 단지 기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언이고, 참여이고, 전파입니다. 우리는 다시 이 떡과 잔 앞에서 고백해야 합니다. “주여, 나는 이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입니다. 이 피 아니면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고난주간, 떡을 뗄 때마다, 잔을 들 때마다, 그분의 죽음을 기억합시다. 그러나 더 나아가, 그분의 생명을 전하며 살아갑시다. 십자가의 고백이 우리의 입술에서, 손끝에서, 일상에서 흘러나오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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