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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주제

설교를 위한 창세기 3장 강해

by 케리그마 2023.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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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설교 포인트

 

창세기 3장은 창조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곧바로 '타락'이란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창조  이후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대략적으로 몇 달이 지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타락은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것이며, 불순종은 소명을 저버리는 일이자, 인간이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순종이 아닌 계명에 대한 주도권을 인간이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거절할 수도, 순종할 수 도 있는 권한을 사용한 것입니다. 일종의 인간의 자유의지가 발동한 것이며, 악하게 사용한 것입니다. 3장의 핵심 주제는 당연히 타락이며, 타락이 무엇이며, 어떻게 진행이 되며,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밝히는 것이 설교의 포인트입니다.

 

타락, 선악과를 먹다

 

● 간교한 뱀

 

간교하다는 '아롬'은 그냥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동일한 칼이지만 악한 자들에게 들리면 무서운 무기가 되지만 의사가 잡으면 사람을 살리는 수술 도구가 됩니다. 도구의 중립성이 존재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뱀은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 뱀의 거짓말

 

타락의 과정을 지금의 눈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특히 뱀을 징그럽게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여기서 뱀은 혐오스럽고 징그러운 존재로 보지 마시고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 여러분이 힘들 때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친절하고 상냥하게 도와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입장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뱀의 간교함입니다. 사단은 자신을 천사로 가장합니다.

  • 고후 11: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뱀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와는 뱀에 속아 넘어갑니다. 왜 넘어갈까요? 분명이 거짓말을 했는데. 다시 2장으로 가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은 오직 아담이 받았습니다. 3장에서는 하와가 답합니다. 그렇다면 하와는 아담에게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와는 뱀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이 대충 가르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는 아담도 하와처럼 불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속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속은 것처럼 꾸미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이 둘은 사실 하나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에 불만이 있었고, 그래서 대충 가르쳤고, 하와도 아담과 동일한 생각을 했기에 속은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싶은 욕심이 타락의 원입니다.

 

  •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합리화

 

죄를 짓고도 죄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모든 죄인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합리화 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타락에서도 이것이 드러납니다. 여자가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탐스럽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좋게 보입니다. 먹어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한 번 죄의 논리에 빠지면 더 이상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고, 볼 수가 없습니다. 악에 눈멀고, 죄에 눈멀어 눈을 떴으나 보지 않고, 귀가 있으나 듣지 않습니다.

  • 마가복음  8장 18절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 이사야  6장 10절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 이사야  35장 5절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 예레미야  6장 10절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 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하지 아니하니

 

● 죄의 확장성

 

죄는 어떤 특정 행위가 아닙니다. 죄는 인격적이고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고, 끊임없이 자신을 확장하려 합니다. 죄는 살아 있는 인격체입니다. 하와는 자신도 먹고, 그 다음 아'자이과 함께 있는 남편'(6절)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물귀신은 반드시 사람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죄가 바로 그렇습니다. 절대 죄는 혼자 짓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끌고 들어옵니다. 공범이 되어야 서로에게 약점이 생기고, 약점은 곧 강한 힘을 발휘하여 더 큰 죄를 짓게 만듭니다.

 

 

타락, 그 이후 끔찍한 결과들

 

● 관계의 죽음

 

7절의 눈이 밝아져는 뭘 말할까요? 눈은 지식, '앎'을 의미합니다. 그럼 서로 알지 못했나요? 아니죠. 그들은 서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서로 믿지 못합니다. 왜 믿지 못하나요? 부끄러움은 상대가 나를 비방할 것을 알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신뢰하는 관계에서 비방하는 관계, 타자의 죽음이 찾아옵니다.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처음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태, 고독이 시작됩니다. 고독은 곧 나와 힘을 합하고 나의 친구가 되고, 나의 도움이 될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개인은 고독이고, 관계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공포입니다. 그래서 타인이 나를 보지 못하도록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치마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고로트는 허리띠(왕상 2:5, 황하 3:21 등)입니다. 즉 자신의 많은 부분을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만을 가리려는 시도입니다. 

 

2:25에서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에서 서로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을 피하여 달아날 때는 자신이 벗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누가 너의 벗었음을 알렸느냐'고 묻습니다. 타인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얻게 됩니다. 타락은 지성을 왜곡시킵니다.

 

● 영적 죽음

논리적 순서는 영적 죽음이 먼저입니다. 타락한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옵니다. '그날'(8절)은 타락한 그 날로 보입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이 소리'는 도대체 뭘까요? 알 수 없으나 과거에도 아담과 하와는 저 소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사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로 숨어 들어갑니다.

 

'거니시는' 할라크는 후에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하여 사용됩니다.(레 226:12, 삼하 7:6-7 등)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걸아 다니셨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 삼하 7:6-7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임재는 느끼고 하나님을 피해 버립니다. 죄를 지으면 이렇게 됩니다. 말씀하지 않고, 죄를 지적하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칩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스스로 들어갑니다. 영광의 보좌를 볼 수 없기 때문이죠.

 

● 육신의 죽음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결국 저주를 받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19절의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 속에는 인간의 실체가 흙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바람을 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지만 타락한 사람에게서 다시 바람을 빼내어 가심으로 흙으로 돌아갑니다. 먼지에서 다시 먼지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입니다.

 

  • 창 3:19 네가 흙(아다마)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아파르)이니 흙(아파르)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 아마마는 대지, 아파르는 먼지를 뜻한다. 

 

육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은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영광의 옷, 빛의 옷을 입혀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빛의 옷은 그리스도의 옷이며, 의의 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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