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3:22 - 13:35 묵상과 강해
좁은 문, 닫힌 문, 울고 계신 예수님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여정은 결코 관광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 끝에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 길 위에서 주님은 단지 말씀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생애를 던지셨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2절부터 35절까지, 이 짧은 본문 안에는 구원에 이르는 길의 진지함과, 돌이키지 않는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눈물이 녹아 있습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그 눈물을 외면한 채 부활의 기쁨만을 말할 수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한 사람이 예수께 묻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눅 13:23) 이는 단지 수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구원에 대한 확신과 그 범위에 대한 종교적 물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적인 숫자로 답하지 않으시고, 방향을 바꾸어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눅 13:24)
여기서 ‘좁은 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스타테아스 푸라스(στενῆς θύρας)’입니다. ‘스테노스(στενός)’는 단순히 폭이 좁다는 의미가 아니라, 통과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압박을 내포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이 단지 작다는 사실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그 문은 ‘닫히는 문’입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눅 13:25) 이 말씀은 종말의 심판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은혜의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 기회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십니다. 누군가는 뒤늦게 문을 두드리며 말합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13:26)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십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닙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은 히브리적 사고에서 관계의 단절을 뜻합니다. 그들은 예배했지만, 말씀을 들었지만, 주님과 인격적 관계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능력은 부인한 자들, 입술로는 가까우나 마음은 먼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이 문 앞에서, 그들은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이는 후회의 극단, 심판의 고통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문을 가볍게 여기고, 말씀을 습관처럼 듣고, 예배를 관습처럼 드릴 때, 혹 주님은 우리에게도 문을 닫으실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은혜의 날이요, 지금은 구원의 때입니다.
동서남북에서 모여드는 자들
그러나 구원은 오직 닫히는 문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반전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눅 13:29)
이는 유대인의 국지적 구원 개념을 깨뜨리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테두리를 넘어, 온 열방에 열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동서남북’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이 향하는 전방위적 지점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사 43:5-6). 주님은 이미 그 지점을 향해 십자가를 통해 열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반전은 더 깊어집니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눅 13:30)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다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신앙의 연수가, 직분의 높음이, 외적인 헌신이 구원의 보증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결, 그분의 십자가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따르느냐입니다.
우리 안의 바리새적 자아는 자꾸 ‘먼저 되고자’ 합니다. 눈에 띄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앞서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스스로 나중 된 자, 자신을 낮추는 자, 무명의 헌신자들이 먼저 되는 질서입니다. 이 질서가 바로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초청 명단에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착각이 심판의 날에는 가장 큰 절망이 되기도 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정말 힘쓰고 있는가?
여우와 어미 닭, 울고 계신 예수님
바리새인 몇 사람이 예수께 와서 경고합니다.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니 이곳을 떠나소서” (눅 13:31) 그 말은 겉보기에 호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몰아내려는 간접적인 압박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저 여우에게 이르라’ 하십니다. (13:32)
헤롯을 ‘여우’라고 표현하신 이 장면은 단지 동물적 별명이 아닙니다. 여우는 교활하고 은밀히 사냥하는 존재입니다. 정치적 술수로 진리를 억압하려는 세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합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병을 고치고,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13:32)
이 말씀은 단순한 시간표의 언급이 아닙니다. ‘오늘-내일-셋째 날’이라는 구조는 유대 전통에서 종말론적 성취의 시간 개념입니다. 특히 ‘제삼일’은 부활을 예표하는 표현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구속사적 완성을 내포한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권력도 주님의 길을 막을 수 없고, 어떤 위협도 하나님의 계획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절대적인 승리의 말씀 뒤에, 예수님의 눈물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함같이 내가 너희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13:34)
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을 어미 닭에 비유하십니다. 이 비유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표현하는 시편의 이미지(시 91:4)와 연결됩니다. ‘날개 아래’는 하나님의 자비와 품으심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그 품을 거부했습니다.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는 이 말씀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넘어서, 고집스러운 불순종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탄식하십니다. 돌로 선지자들을 죽이고, 보냄을 받은 자들을 돌로 치는 그 땅.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정죄만 하시지 않습니다. 우십니다. 애통하십니다. 그리고 그 울음이 곧 십자가의 피가 됩니다. 그 피로 예루살렘조차 다시 품으시기 위해, 그 피로 그들의 돌보다 단단한 마음을 부수기 위해, 주님은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십니다.
결론
좁은 문 앞에 선 우리는, 구원의 길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너무 좁아 보여 외면하고, 때로는 문이 닫히기 전까진 아직 여유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단호히 말합니다. 문은 닫힐 수 있으며, 주님은 지금도 울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우 같은 세상의 권력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으시고, 어미 닭처럼 당신의 백성을 품으시려 날개를 펼치셨습니다. 그 날개는 십자가 위에서 찢기지만, 그 찢김 안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다시 좁은 문을 바라봐야 합니다. 넓은 길이 편해 보일지라도, 주님은 좁은 문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문을 지나 주님과 함께 울고, 주님과 함께 부활의 셋째 날을 맞이하는 우리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한 번, 지금 이 시간이 은혜의 때임을 기억하며,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문 앞에서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그 문은 아직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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