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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4:1 - 14:14 주해 및 묵상

케리그마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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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으뜸인가: 초대받은 자, 낮아진 자, 갚을 수 없는 은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의도된 은혜의 행보였습니다.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은 단지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끊임없이 재정립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절부터 14절까지는 한 안식일,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에 초대받은 자인가’에 대한 도전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고난주간,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다시 자리를 정돈하고, 영적 초대장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안식일의 잔치, 곪은 종교의 민낯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눅 14:1)

표면적으로는 초대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은밀한 감시와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잔치 자리에서 단지 손님으로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영혼의 질서를 뒤집는 주인이 되어, 거짓된 경건의 외피를 벗기십니다.

한 수종병 든 사람이 예수님 앞에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병이 아니라 ‘히드로피코스(ὑδρωπικός)’, 몸 안에 물이 차서 부어오르는 증상을 말합니다. 이 병은 율법적으로 부정하게 여겨졌고, 동시에 당시 유대인들은 이를 하나님의 저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런 자가 안식일의 식사 자리, 바리새인의 집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입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장치였던 셈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눅 14:3) 모두가 침묵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고쳐 보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눅 14:5)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의 문자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드러내십니다. 율법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지, 사람을 억압하기 위한 조항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의 본뜻을 잃어버렸고, 그 빈 껍데기만을 지키기 위해 눈앞의 생명을 외면했습니다. 그리고 그 외면 속에서, 자신들의 영적 무감각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혹은 경건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자주 사람을 판단하고, 누군가를 회복보다 심판으로 몰아세웠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죄의 결과로만 바라보고, 정죄의 도구로 율법을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바리새인의 자리에 앉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높은 자리에 대한 집착과 거꾸로 된 자리 배치도

예수님은 이어 잔치 자리에 앉은 이들을 주목하십니다.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택해 앉으려는 모습을 보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눅 14:8)

당시 유대 사회는 철저한 서열 중심 구조였고, 잔치 자리에서도 그 질서는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은 단지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명예와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말석에 가서 앉으라” (눅 14:10)

 

이 말씀은 단순한 처세술이 아닙니다. ‘스스로 낮추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임을 받는다는 원리, 즉 십자가의 역설을 보여주는 핵심 구절입니다. 헬라어 ‘타페이노오(ταπεινόω)’는 ‘자기를 낮추다’라는 의미인데, 이는 단지 위치를 바꾸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낮아짐의 절정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입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빌 2:6-8)

 

하나님의 나라는 역전의 나라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낮은 자가 높아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역전은 단순히 뒤집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리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높일 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을 맡기고 낮출 때 비로소 그 자리를 얻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자리 욕망은 어떠합니까? 교회 안에서도, 직분과 인정, 역할과 이름에 대한 은밀한 갈망은 없는지, 그 자리에 자신을 끼워 넣기 위해 은혜를 수단으로 삼은 적은 없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자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리를 향한 마음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을 뚫어보셨고, 그 욕망의 중심에 복음을 심으십니다.

 

갚지 못할 자들을 초대하라

예수님은 잔치를 베푼 바리새인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을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눅 14:12) 당시 유대 사회의 식사 초대는 사회적 계약이었습니다. 초대는 대가를 기대하는 행위였고, 잔치 자리는 신분과 관계를 공고히 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눅 14:13) 이는 단순히 자선을 권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자격자에게 임하는 은혜이며, 그 은혜를 경험한 자는 다시 무자격자에게 흘려보내야 한다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헬라어 ‘아나페로(ἀναφέρω)’는 ‘되갚다’, ‘보상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 보상의 질서를 뒤집으십니다. 갚을 수 없는 자를 초대하는 것이 참된 의이며, 그 보상은 ‘의인의 부활 때’ 주어질 것이라 하십니다. (눅 14:14)

 

고난주간을 맞은 우리가 이 말씀 앞에서 다시 무릎 꿇을 때, 우리의 초대장은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갚을 수 있는 자만을 초대하고 싶은 본성이 있습니다. 유익을 주는 관계, 안정된 인간관계만을 유지하려는 마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갚을 수 없는 자들을 위한 초대장이었다고. 나도 그 초대에 값없이 참여한 자라고.

 

오늘 우리의 공동체, 우리의 가정과 교회는 누구를 향해 문을 열고 있습니까? 진짜 복음의 향기가 퍼지는 곳은, 값진 대접보다 갚지 못할 자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있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그런 잔치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을 본척만척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결론

누가복음 14장의 본문은 예수님의 세 가지 메시지를 한 장면 안에 절묘하게 담아냅니다. 안식일의 치유를 통해 생명의 가치를 되살리시고, 자리를 고르는 자들의 마음을 파헤치시며, 초대의 기준을 전복시키시는 주님의 통찰은, 단순한 도덕 교훈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요, 십자가의 삶을 부르시는 초청장입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지금 어느 자리에 앉아 있는가? 나는 누구를 초대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으로 그 자리를 정당화하고 있는가?

 

주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낮은 자리를 택하라. 갚지 못할 자를 향해 문을 열어라. 그리고 안식일이라도 생명을 살리는 일을 주저하지 말라. 이 세 가지는 단지 선한 삶의 표지가 아니라, 십자가를 따르는 삶의 방식입니다.

주님의 식탁에는 여전히 수종병 든 자, 말석에 앉은 자, 가난하고 저는 자들이 초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식탁의 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 자리로 나아갑시다. 높아지려 하지 말고, 그분의 높으심 아래로 들어갑시다. 그것이 참된 영광이요, 의인의 부활 때 받게 될 상급입니다.


매일성경 3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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