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누가복음 14:15 - 14:24 묵상과 강해, 잔치를 거절한 사람들

케리그마 2025. 3. 26.
반응형

잔치를 거절한 사람들, 은혜를 채운 사람들

누가복음 14장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하신 비유의 절정부입니다. 이미 안식일의 자리에서,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이들의 허영을 꿰뚫으시고, 갚지 못할 자를 초대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은 거슬릴 정도로 급진적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눅 14:15) 고백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그 상황을 무마하려는 종교적 인용에 불과합니다. 그 말에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잔치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듣는 자의 심장을 향해 쏘는 화살처럼 예리합니다. 고난주간에 이 말씀을 듣는 우리도 그 잔치의 초대 앞에 서 있습니다. 초대장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깊이 있는 회개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먼저 초대된 자들의 거절

비유의 시작은 잔치입니다. 한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습니다. 유대 풍습에 따르면 초대는 두 번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 초대는 잔치가 준비되기 전, 참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초대이고, 두 번째는 잔치가 준비된 후 ‘이제 오십시오’ 하고 알리는 초대입니다. 이 비유는 두 번째 초대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종이 나아가 말합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눅 14:17)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초대받은 이들이 일제히 사양합니다. 단 한 사람도 잔치에 오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사유는 이렇습니다. “나는 밭을 샀으니 나가 보아야 하겠고”,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니 시험하러 가야 하겠고”, “나는 장가 들었으니 못 가겠노라” (14:18-20)

이 이유들은 얼핏 보면 현실적인 핑계처럼 보입니다. 밭, 소, 결혼. 모두 인생에서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각각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인간 본성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재산, 사업, 가정. 하나님보다 더 우선순위에 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지금 당장’ 와야 할 잔치 앞에서, ‘나중에’ 혹은 ‘다음에’라는 핑계를 댑니다.

흥미로운 점은, 잔치가 준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주인은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선언합니다. 헬라어 ‘헤토이마(ἕτοιμα)’는 완벽히 준비된 상태, 즉 더는 보탤 것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은혜는 이미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마쳤고, 구속은 완성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완성된 은혜 앞에, 사람들은 다른 일에 몰두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사양이 아닙니다. 유대 문화에서는 이미 초대에 응답해 놓고, 잔치 자리에 오지 않는 것은 모욕이며, 주인을 향한 공개적인 거절입니다. 이 비유 속 사람들은 단순히 바쁜 것이 아니라, 주인을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거절한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장면에서 자신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말씀 앞에, 예배 앞에, 회개의 자리에 우리는 얼마나 ‘나중에’를 말합니까?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자주 영원을 밀어냅니까? 이 핑계들은 단지 상황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자리를, 그들은 애초에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분노하시는 주인과 열린 초대

초대받은 자들의 집단적인 거절은 주인을 분노케 합니다. “그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눅 14:21)

‘노하다’는 이 단어는 단순한 감정적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영원하지만, 거절당한 은혜 앞에서는 반드시 공의로 반응하십니다. 그리고 그 진노는 새로운 은혜의 방향으로 전환됩니다.

주인은 즉시 ‘시내 거리와 골목’으로 종을 보냅니다. 이는 도시 빈민층, 사회적 소외자들을 상징합니다. 가난한 자, 장애인, 보잘것없는 자들. 그들은 원래 초대 명단에 없던 자들이지만, 은혜는 그들을 향해 열립니다. 더 놀라운 점은, 여전히 자리가 남았다는 종의 말입니다. 그러자 주인은 명령합니다. “길과 산 울타리까지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 14:23)

여기서 ‘강권하여’라는 단어는 헬라어 ‘아낭카조(ἀναγκάζω)’입니다. 이는 단순한 권유가 아니라, 간청하고 설득하여 억지로라도 데려오는 강한 초청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집, 곧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반드시 채우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십니다. 은혜의 초대는 점점 더 변두리로 확장되며, 아무 자격 없는 자들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복음의 확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먼저 초대받은 자들’이 거절한 자리, 그 자리는 이방인들, 죄인들, 세리와 창기들, 나아가 오늘 우리 같은 자들이 앉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통이 아니라, 응답의 자격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다시 깨어나야 합니다. 나는 정말 그 잔치에 앉고 싶은 사람인가? 아니면 이미 초대받았지만, 은근히 피하고 있는 자인가? 오늘 이 말씀이 들릴 때, 그 초대에 ‘예’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잔치를 막은 진짜 이유

비유의 마지막은 냉혹한 선언으로 끝납니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눅 14:24)

이 선언은 그저 현실적 결과가 아니라, 종말론적 심판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한 자들은, 그 잔치의 영광을 결코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들었던 바리새인들에게 분명한 경고를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알고, 예배를 드리며, 말씀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보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초대에 대한 ‘반응’입니다.

‘맛보다’는 단어 ‘게우오마이(γεύομαι)’는 단순히 입에 대는 행위가 아니라, 체험적 참여를 의미합니다. 즉, 은혜의 맛을 실제로 아는 자는, 단지 교리를 아는 자가 아니라 그 은혜를 ‘살아낸’ 자라는 뜻입니다. 초대장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지금 내가 그 은혜의 맛을 실제로 누리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늘 ‘지금’ 우리를 부릅니다. 잔치는 준비되었고, 종은 계속해서 거리를 누비고 있습니다. 주님의 초대는 오늘도 계속됩니다. 교회는 그 종의 역할을 부여받은 공동체입니다. 복음의 초대장을 들고, 여전히 골목을, 울타리를, 길바닥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그 초대를 거절하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고, 아직 초대를 받지 못한 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는 일에 게으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집을 채우기 원하시며, 그 집은 빈자리가 없습니다. 마지막 자리가 남았을 때, 내가 그 자리에 있고 싶은지 진지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결론

예수님의 이 잔치 비유는 듣는 이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말씀입니다. 초대받은 자들의 무관심, 거절, 핑계는 하나님 나라를 가로막는 신앙의 현실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자리를 새로운 이들로 채우시며, 은혜의 복음을 변두리로 넓혀가십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이 초대장 앞에서 다시 서야 합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선언이 여전히 들리는 이때, 나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가? 은혜의 자리보다 당장의 일상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가? 주님의 잔치는 시작되었고, 자리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오늘,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거절당한 자리를 대신한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이 초대장을 흔들며, 망설이지 말고, 돌아서서, 그 자리로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식탁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매일성경 3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