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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1 - 15:10 묵상과 강해,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케리그마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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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기쁨으로 맞이하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5장은 예수님의 비유들 가운데 가장 따뜻하면서도 도전적인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비난과 정죄의 시선을 넘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그려내는 세 개의 이야기 가운데, 오늘 우리는 그 첫 두 가지 비유를 만나게 됩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그리고 잃어버린 드라크마 한 개.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복음의 핵심을 보게 됩니다. 고난주간,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 안에는 바로 이 비유의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버림받은 자, 비난받은 자, 잃어버린 자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이 예수님의 전 존재를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마도 누가복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은 그 안으로 들어가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만나봅시다.

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 15:1) 누가는 이 장면을 매우 의도적으로 시작합니다. ‘모든’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이끌린 사람들이 제도 종교의 바깥에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세리와 죄인, 즉 당시 유대사회에서 종교적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 배척당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엥기조(ἐγγίζω)’는 단순히 물리적 접근이 아니라, 마음의 갈망을 담아 의도적으로 다가가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반면, 2절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수군거리며 이르되”라는 말로 등장합니다. 이는 ‘디아고류조(διαγογγύζω)’라는 단어인데, 이는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강한 내적 거부의 감정을 내포한 말입니다.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께 반응한 두 무리. 한쪽은 다가오고, 한쪽은 거리두기 합니다. 누구는 말씀을 듣고자 가까이 가고, 누구는 말씀을 걸러내려 멀리합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메시지보다, 그 메시지를 듣는 이의 상태에 달려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예배 자리에 앉아 있지만, 누구는 은혜를 사모하며 한 단어라도 붙들고자 애쓰고, 누구는 말투와 형식을 따지며 비평합니다. 하나님은 갈망하는 자에게 말씀하시고, 회개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십니다. 그것이 복음의 방식입니다.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신 목자의 마음

예수님은 그 수군거림에 응답하여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눅 15:4)

이 비유의 핵심은 ‘찾아내기까지’입니다. 헬라어 ‘헤오스 휴로(ἕως εὕρῃ)’는 목적 달성 전까지 결코 중단하지 않는 집념을 뜻합니다. 목자는 단순히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의지를 갖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한 마리를 찾았을 때, 기뻐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양 한 마리는 전체의 1%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그 한 마리가 전부입니다. 아흔아홉이 아니라, 한 마리를 찾으시는 하나님. 잃은 자의 가치는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께는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단순한 감정적 연민이 아닙니다. 양을 찾아 나선 이의 수고, 위험, 인내가 담긴 실존적 행동입니다. 이는 곧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목자이신 예수께서 잃은 자 하나를 위해 들로, 광야로, 죽음의 골짜기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잃은 자를 찾아 어깨에 메셨습니다. ‘어깨에 메다’는 표현은 깊은 애착과 기쁨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짐이 아니라 기쁨으로 품으십니다.

이 장면은 신학적으로도 깊은 메시지를 던집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단지 잃은 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은 인간의 자발적 선택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잃은 자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잃은 자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는 양을 데리고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말합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눅 15:6) 구원은 개인적 사건이지만, 공동체적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교회는 이 기쁨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누군가의 회복, 누군가의 구원 앞에 함께 기뻐하는 그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너무 계산적으로 반응합니다. 쟤는 원래 그럴 줄 알았다거나, 아직 진짜 변했는지 의심부터 하는 경우가 있지요.

드라크마 한 개를 찾아 불을 켠 여인

이어서 예수님은 또 하나의 비유를 덧붙이십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눅 15:8) 드라크마는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이 열 개의 드라크마는 여인의 전 재산이거나, 결혼지참금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단순한 동전 한 개가 아니라, 인생의 가치를 담은 상징입니다.

여인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습니다. 여기서 ‘등불을 켜다’는 행위는 상징적으로 성령의 조명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어둠 가운데 숨겨진 생명을 비추어냅니다. ‘부지런히’라는 말은 헬라어 ‘엥티모스(ἐπιμελῶς)’로, 깊은 열정과 인내의 노력을 내포합니다.

이 여인의 행동은 성령께서 잃은 자를 찾아 역사하시는 방식과 닮았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어둠을 밝히고, 구석구석을 쓰시며, 끝내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 여인은 이웃과 친구들을 불러 말합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눅 15:9)

예수님은 이 비유들의 끝마다 하늘의 기쁨을 강조하십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10) 이는 단지 기쁨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천군천사가 함께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회개는 하늘의 환호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께는 우주적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라는 단어에 집중해야 합니다. 헬라어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마음과 방향, 삶 전체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잃은 자는 반드시 돌아서야 합니다. 은혜는 찾아오지만, 회개 없이는 기쁨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결론

누가복음 15:1-10은 단지 두 개의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관한 한 폭의 초상화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들을 통해, 당신이 누구를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 왜 십자가를 지시는지, 그리고 그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잃은 자를 찾으십니다. 단 한 마리 양을 위해, 한 개의 드라크마를 위해. 그것이 주님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고난주간의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지금도 잃은 자를 찾아 골목과 어둠 속을 누비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스스로 바리새인의 위치에 서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양처럼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지. 중요한 것은, 주님이 지금도 찾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찾으신 자를 어깨에 메시고, 하늘과 함께 기뻐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잃은 자였던 우리, 그리고 여전히 잃은 자들을 위해, 교회는 오늘도 불을 켜고,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마음을 닮은 공동체로 살아가야 합니다. 고난주간,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잃은 자를 품는 여정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매일성경 3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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