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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1 - 16:13 묵상과 강해, 불의한 청지기

케리그마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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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불의, 하나님 나라의 계산법

누가복음 16장은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도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으로 손꼽힙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등장하고, 주인은 그 청지기를 칭찬하는 듯한 표현을 하십니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종종 의문에 빠집니다. 과연 예수님은 불의한 행동을 옳게 여기신 것일까? 그러나 이 본문은 돈에 대한 단순한 교훈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대의 물질적 가치와 영원한 가치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며, 하나님 나라의 계산법을 가르치는 강력한 선포입니다. 고난주간을 묵상하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청지기의 종말 앞에 선 지혜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눅 16:1) ‘낭비하다’는 단어는 앞서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허비했던 단어 ‘디아스코르피조(διασκορπίζω)’와 동일합니다. 이는 단순히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하고 무가치하게 흩어버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청지기는 맡은 자였지만, 그 책임을 방기했고, 결국 해고 통보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 이후의 반응입니다. 그는 속히 현실을 파악합니다. “내가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눅 16:3) 그리고는 결단합니다. ‘이제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눅 16:4) 그는 자기 앞에 닥친 종말을 인식하고, 남은 시간을 전략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각자에게 빚을 줄이게 합니다. 어떤 이에겐 기름 백 말 중 오십으로, 어떤 이에겐 밀 백 석 중 팔십으로. 이것은 법적으로 보면 무책임하고 불의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놀랍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이를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눅 16:8)

여기서 ‘지혜 있다’는 표현은 헬라어 ‘프로나이모스(φρονίμως)’로, 현명하게, 실용적으로, 미래를 준비하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불의함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미래를 위해 행동한 ‘지혜’를 주목하신 것입니다. 그는 땅의 방식으로라도 장래를 준비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한 장래 앞에 너무도 무감각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종말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청지기의 모습을 보며, 부끄럽게 반성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도 자기 앞의 위기를 위해 계산하고 움직이는데, 우리는 종말을 믿는다 하면서도 너무 안일하게, 무방비로 오늘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중요한 원리를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리라” (눅 16:9)

‘불의한 재물’은 원어로 ‘마몬 타 아디키아스(μαμωνᾶ τῆς ἀδικίας)’입니다. 여기서 ‘마몬’은 재물을 의인화한 표현이며, ‘불의한’은 이 세상에서 재물이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이 불의한 도구를 전혀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단순한 인간관계를 넘어섭니다. 이는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연약한 자를 향해 재물을 사용함으로써, 그 영혼들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통로가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원한 처소’로 영접한다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과 환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땅의 재물은 반드시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사라질 재물을 통해,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관계와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돈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목적 없이 쌓이면 탐욕이 되고, 사랑 없이 쓰이면 권력이 됩니다. 그러나 복음의 방향으로 흘러가면, 재물조차 거룩한 도구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재물을 모으고, 어디에 그것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와는 무관한 소비, 자기를 위한 축적, 체면과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한 지출이 혹 우리의 삶을 잠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불의한 재물을 불의하게 쓰는 세상 한가운데서, 그 재물을 지혜롭게 바꾸어 천국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무리하면서, 결정적인 결론을 주십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 16:10)

재물은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작은 것을 통해 우리의 신뢰도를 판단하십니다. 헬라어 ‘피스토스(πιστός)’는 충성되고, 신실하다는 뜻인데, 이는 단지 정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인의 뜻에 맞게 자원을 사용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다른 사람의 것’이라 부르십니다. 이는 모든 소유의 궁극적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가진 것, 벌어들인 것, 관리하는 모든 것은 위탁받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것’을 맡기시기 전에, 이 작은 것에서의 충성이 시험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으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이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3)

이 구절은 오늘 우리에게 직접 던지는 칼날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도 섬기고, 재물도 관리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겸하여’라는 가능성을 잘라내십니다. 재물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다스려야 할 수단입니다. 그러나 재물에 마음이 붙는 순간, 그 수단은 주인이 되고, 우리는 종이 됩니다.

‘섬기다’는 헬라어 ‘둘류오(δουλεύω)’는 노예처럼 섬기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노예적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시지만, 재물은 노예적 충성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자유 가운데 사랑하게 하시지만, 재물은 불안과 욕망으로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선택한 자는, 재물의 권세 아래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말씀은 고난주간을 지나는 우리에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은 삼십에 팔리셨고, 그리스도께 등을 돌린 자는 돈주머니를 움켜쥔 유다였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리지만, 탐욕은 사랑을 배신하게 만듭니다. 결국 누가 우리의 주인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우리가 무엇을 더 사랑하느냐입니다.

결론

누가복음 16:1-13은 복잡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선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를 통해, 예수님은 이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얼마나 다르고, 무엇을 기준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위임받은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주인이 다시 오실 날은 분명히 다가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의 재물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날마다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곧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드러냅니다.

고난주간, 십자가 앞에 서서 다시 묻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가? 혹시 내가 붙들고 있는 작은 통장, 감추어진 소비 패턴, 포기하지 못한 계산 속에 또 다른 주인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불의한 청지기는 잃어버릴 때를 알고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잃기 전부터 준비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계산합시다. 그것이 믿음의 지혜요,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는 길입니다.


매일성경 3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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