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14 - 16:31 묵상과 강해, 부자와 나사로 뒤바뀐 운명
보이지 않는 강 너머, 돌아올 수 없는 자리
누가복음 16장 후반부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이야기, 그러나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이 비유는 천국과 지옥, 물질과 영원, 현재와 종말을 하나의 강렬한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단지 지옥의 무서움을 알리려는 공포 설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은혜의 경고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한 우리에게 이 비유는 십자가를 앞두고 깨어 있어야 할 자리, 돌아올 수 없는 강 건너편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한 자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눅 16:14) 이 구절은 앞선 청지기의 비유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물에 대한 교훈을 듣고도 그것을 조롱합니다. 헬라어 ‘에클레우로네오(ἐκμυκτηρίζω)’는 ‘코웃음을 치다’는 뜻입니다. 가볍게 여기고, 우습게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돈이 곧 경건의 증거라고 믿었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자로다” (눅 16:15) 여기에 쓰인 ‘가증하다’는 단어는 헬라어 ‘벨루그마(βδέλυγμα)’로, 혐오스럽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정한 상태를 말합니다. 즉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속은 탐욕으로 가득한 자들의 실상을 하나님은 혐오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눅 16:16) 여기서 ‘요한’은 세례 요한을 의미하며, 구약의 시대에서 복음의 시대로 전환되는 경계를 뜻합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 복음의 시대, 하나님 나라가 강력하게 선포되고 있는 시점에 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나라를 억지로라도 들어가야 할 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침노한다’는 말은 헬라어 ‘비아조마이(βιάζομαι)’로, 힘써 쟁취하다, 간절히 들어가려 애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귀로는 율법을 외우고, 발로는 하나님 나라를 거절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돈 앞에서는 얼마나 유약해집니까? 재물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복을 판단하고, 심지어 신앙의 성숙도까지 착각합니다. 예수님은 그 기준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십니다.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도리어 혐오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자의 죽음, 나사로의 안식
예수님은 이어서 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눅 16:19) 자색 옷은 왕족이나 제사장 계층이 입던 고가의 옷이었고, 고운 베옷은 부드럽고 값비싼 속옷을 의미합니다. 즉 그는 외적으로는 성공의 상징을 입고 살던 자였습니다.
반면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이름과는 다르게, “몸이 헌데 투성이로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졌다”고 기록됩니다. 그는 스스로 그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 의해 ‘버려졌습니다’. ‘에비블레토(ἐβέβλητο)’라는 이 단어는 수동태이며, 타의에 의해 고통당하는 자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엔 완전히 반전됩니다.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었다” (눅 16:22-23)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의 안식을 의미하며, 음부는 헬라어 ‘하데스(ᾅδης)’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고통의 장소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반전의 원인이 단지 부자였기 때문도, 가난했기 때문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도처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 가난 그 자체를 의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는 부자가 그 대문 앞에 누워 있는 나사로를 보았으나, 끝내 그를 외면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고통 받는 자와 거리를 두었고, 자기만의 즐거움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피로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심판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 우리에게 너무도 현실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대문 앞에 누운 나사로를 보고 있는가? 주님은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라며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곧 주님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자주 ‘보지 못했다’고 말하며 살아갑니다. 사실은 보았으나,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보는 뉴스 속 고통도, 우리의 ‘대문 앞’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조차 너무 바쁘고, 너무 익숙하고, 때론 너무 무감각합니다.
넘을 수 없는 강, 들리지 않는 말씀
이제 부자의 요청이 이어집니다. 그는 물 한 방울을 구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또 한 가지를 간청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아직 다섯 형제가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소서” (눅 16:27-28) 그는 지옥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간청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생전에 자신 외에는 아무도 관심 없었지만, 죽어서야 타인을 위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 16:29) 이는 곧 율법과 선지서, 구약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주어졌고,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는 말합니다. “아닙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누가 가면 회개할 것입니다.” (눅 16:30) 그의 생각은 기적이 말씀보다 더 큰 감화를 줄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호히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눅 16:31) 이것은 누가복음을 읽는 우리 독자들에게는 곧 예수님의 부활을 염두에 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않습니다. 말씀 앞에 귀를 닫은 자는 어떤 기적 앞에서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말씀 앞에 열려 있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기적을 갈망하면서도, 정작 날마다 들리는 말씀에는 무뎌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십니다. 구원은 감정이 아니라 믿음이며,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롬 10:17)
결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죽음 이후를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도덕 교훈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진리입니다.
고난주간, 이 말씀은 십자가를 마주한 우리에게 다시 묻습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보고 있는가? 나는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느 강 쪽에 서 있는가?
강을 건넌 후에는 되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그 강을 건너기 전입니다. 지금은 여전히 나사로를 볼 수 있고,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시간입니다. 지금은 은혜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고, 곁에 있는 자를 향해 손을 내밀고, 눈앞의 소유보다 영원의 가치를 붙들며 살아갑시다. 그리고 기억합시다. 부자가 지옥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말씀이 전부라는 것을, 지금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매일성경 3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토픽 > 매일성경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17:11 - 17:19 묵상과 강해, 열 명의 나병환자 (0) | 2025.03.26 |
---|---|
누가복음 17:1 - 17:10 (0) | 2025.03.26 |
누가복음 16:1 - 16:13 묵상과 강해, 불의한 청지기 (0) | 2025.03.26 |
누가복음 15:11 - 15:32 묵상과 강해, 탕자의 귀향 (0) | 2025.03.26 |
누가복음 15:1 - 15:10 묵상과 강해,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0) | 2025.03.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