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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1 - 17:10

케리그마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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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림 없이, 용서하며, 맡은 일에 충성하여

누가복음 17장 1절부터 10절까지는 매우 짧고 간결한 말씀들이 이어지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신앙생활의 본질을 흔들 정도로 깊고도 도전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세 가지 영적 태도—걸림을 주지 않는 삶, 용서하는 마음, 그리고 종으로서의 자기 위치 인식—을 차례로 말씀하십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누군가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존재는 아니었는가, 용서 없이 관계를 끊어버리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마치 공로인 듯 여겨 자랑하진 않았는가.

실족하게 하지 말라: 책임 있는 삶의 무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도다” (눅 17:1)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실족’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스칸달론(σκάνδαλον)’에서 나왔는데, 이는 덫, 올무, 장애물의 의미를 갖습니다. 즉 누군가를 죄로 이끄는 유혹이나 시험의 원인이 되는 삶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메이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눅 17:2) 이는 단순한 비유 이상의 무게를 지닌 표현입니다. ‘작은 자’는 곧 믿음이 연약한 자들, 갓 믿음을 시작한 자들, 공동체 안에서 보호받아야 할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거나 혼란케 하는 행동은 주님 앞에서 극단적 책임을 묻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서도 이 말씀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자주 내 말 한 마디, 내 행동 하나가 다른 이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무감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요구하십니다. 신앙은 개인의 문제이지만,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실수나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끊어낼 수 있는 위험한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용서의 비현실성과 복음의 초현실성

예수님은 이어서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꾸짖고,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눅 17:4)

‘일곱 번’은 단순히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완전수로 여겨지며, 무한 반복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 같은 잘못을 반복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비현실적인 명령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용서란 단순히 감정의 해소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자이기에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반대의 방향으로 살고 있습니다. 내 상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고, 다른 사람의 회개는 의심과 판단으로 평가되기 일쑤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사도들은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눅 17:5) 이는 단순히 감동받아서 외친 반응이 아닙니다. 용서의 삶이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나 정확히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라’는 명령은 곧 ‘믿음으로 살라’는 부르심과 같은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도 그렇게 하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전제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지라도 그대로 되었으리라” (눅 17:6) 겨자씨는 작지만 생명력 있고 자라나는 씨앗입니다. 믿음이란 크고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 생명처럼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능력입니다. 진짜 믿음은 언젠가 반드시 용서를 자라게 하고, 뿌리 깊은 미움조차 뽑아내게 합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그 씨앗조차 뿌리기를 게으르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종의 자세, 마땅히 할 일을 하고도 자랑하지 말라

예수님은 비유 하나를 더 들려주십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에게 ‘어서 와서 앉아서 먹으라’ 하겠느냐?” (눅 17:7) 이 말씀은 당시 노예 제도를 전제로 한 문화 속에서, 종이 마땅히 주인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질서였다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은 종이 돌아오면, 식사 시중까지 마친 후에야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10) ‘무익한 종’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한 일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세울 자격이나 공로가 없다는 겸손의 고백입니다.

신앙생활이 오래될수록,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이 복 주셔야 한다’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께 보상을 청구하듯, 기도하고 섬기고 예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겸손은 십자가 앞에서만 배울 수 있는 태도입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의 수난과 순종을 바라보며 우리는 진정한 종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분이야말로 ‘마땅히 하실 일을 감당하신’ 진정한 종의 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따르는 종들입니다.

우리의 순종은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용서하고, 헌신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공로가 아니라 본분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종들에게 마지막 날 “잘하였다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결론

누가복음 17:1-10은 짧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에게 필요한 삶의 자세를 아주 깊이 있게 가르쳐 줍니다. 실족하게 하지 말라. 용서하라. 그리고 종의 자세로 살아라. 이 세 가지는 제자의 길을 떠받치는 세 기둥입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다시 십자가의 길로 초대받습니다. 누군가의 믿음을 지켜주는 사람, 반복되는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 그리고 마땅히 할 일을 한 후에도 자랑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 그런 이가 하나님 나라의 제자입니다.

오늘도 그 말씀을 따르며, 주님의 뒤를 따라 걸어갑시다. 연약해도 좋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면 충분하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렇게 우리가 살아낼 때, 그 삶 자체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매일성경 3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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