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7:20 - 17:37 묵상과 강해,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
보이는 나라가 아니라, 속히 임할 나라
누가복음 17장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을 향해 종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깊은 통찰을 말씀하십니다. 특히 이 본문은 종말에 대한 헛된 호기심과 잘못된 징조 해석에 빠진 이들을 경계시키며,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가르침입니다. 고난주간,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어떤 삶의 자세로 그날을 맞이해야 하는지 되물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묻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눅 17:20) 그들은 메시아가 오면 가시적인 변화와 정치적 해방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의심하며, 정확한 시기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0-21)
‘볼 수 있게’라는 표현은 헬라어 ‘파라테레시스(παρατήρησις)’로, 감시하거나 관측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천문학처럼 계산되거나, 정치적 혁명처럼 외형적으로 관측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헬라어로는 ‘엔토스 휘몬(ἐντὸς ὑμῶν)’입니다. 이는 단지 내면적 감정이나 개인적 체험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 예수님의 임재 속에,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의 삶 속에 이미 시작된 현실을 말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이해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재림으로 완성될 나라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서도 경험되지만, 아직 완전하게 도래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살아가며,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바리새인의 질문을 반복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입니까? 주의 재림은 언제입니까?" 그리고 많은 이들이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고, 세계의 혼란을 종말의 징조로 해석하며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 가운데 임해 있습니다. 그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계산이 아니라 회개가, 지식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날은 번개처럼 임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 깊은 말씀을 주십니다. “인자의 날에는 번개가 하늘 아래 이 편에서 나서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그렇게 되리라” (눅 17:24) 이는 인자의 날, 곧 재림의 순간이 은밀하지 않고, 온 인류가 목격하게 될 공개적 사건임을 말합니다. 번개는 예고 없이 갑자기 임하며, 동시에 전체를 비춥니다. 종말은 그렇게 모든 인류에게 동시에 다가올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기 전에 예수님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림 받으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눅 17:25) 이는 십자가의 고난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영광의 주님은 먼저 고난받는 종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영광 앞에 고난이 있고, 부활 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순서를 거꾸로 생각하고, 고난 없는 구원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늘 멀게만 느껴지고, 현재의 삶은 버겁게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노아와 롯의 때를 비유로 들어 종말의 날을 설명하십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고…” (눅 17:27)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눅 17:29)
이 구절들의 핵심은 단지 ‘죄의 심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날까지도 ‘일상을 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일상의 평온함 속에 숨어 있는 영적 무감각. 하나님 없는 평온은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심판이 가까운 줄도 모르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 안주하며 살아갑니다. 그날은 그렇게 불시에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날이 됩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 날을 잊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내일이 올 것처럼, 다음 주에도 여전히 이 삶이 계속될 것처럼 말입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예수님은 한 구절, 매우 짧지만 강력한 명령을 던지십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눅 17:32) 그녀는 소돔에서 구원받던 길에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 돌아봄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미련과 집착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서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소돔을 떠나길 원하셨지만, 그녀는 거기에서 돌아서지 못했습니다.
그날,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맞이하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눅 17:33) 이는 복음서 전체에 흐르는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자기 생명을 붙들려는 사람은 결국 그것을 놓치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려놓는 자가 오히려 생명을 얻는다는 역설.
그날은 두 사람이 같은 침상에 있어도,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집니다. 두 여인이 함께 맷돌을 갈고 있어도, 하나는 남고 하나는 떠납니다. (눅 17:34-35) 외형적 구분이 없는 공동체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십니다. 은혜의 날에 반응한 자, 지금의 삶 속에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 자는 들려올립니다. 반대로, 익숙함과 세속의 무게를 붙든 자는 그 자리에 남겨집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흔들립니다. 지금의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과도 다른 종말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이 경고. 주님은 결코 단체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하나의 영혼을 친히 아시고, 각각의 믿음을 기억하십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주여 어디니이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주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눅 17:37) 이는 종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상징적 비유입니다. ‘주검’은 심판과 죽음을, ‘독수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어디서든 심판은 피할 수 없고, 하나님의 때는 분명히 임한다는 선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준비해야 할 자리입니다.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을 미루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누가복음 17:20-37은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고, 삶의 중심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말씀이자 경고입니다. 보여지는 나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임하신 그분 앞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초청입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는 우리는 오늘도 십자가 앞에 다시 묻습니다. "나는 그날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가?" 종말은 계산할 수 있는 날이 아니라, 준비된 자에게만 임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그날, 번개처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그 날처럼 살아갑시다. 하나님 나라를 내 안에 품고, 소돔을 향한 미련 없이,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오늘도 그분은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리고, 롯의 처를 기억하라."
매일성경 3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토픽 > 매일성경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18:1 - 18:14 끈질긴 기도 (0) | 2025.04.13 |
---|---|
매일성경 본문 2025년 4월 (0) | 2025.03.26 |
누가복음 17:11 - 17:19 묵상과 강해, 열 명의 나병환자 (0) | 2025.03.26 |
누가복음 17:1 - 17:10 (0) | 2025.03.26 |
누가복음 16:14 - 16:31 묵상과 강해, 부자와 나사로 뒤바뀐 운명 (0) | 2025.03.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