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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11 - 15:32 묵상과 강해, 탕자의 귀향

케리그마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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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아들, 멀어진 아들, 기다리는 아버지

누가복음 15장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신다는 이유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을 받으시며 하신 세 개의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에 이어 마지막으로 주어진 ‘잃은 아들’의 비유는 단지 가족 서사의 감동을 넘어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사랑과 죄인에 대한 구원의 깊이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죄인의 타락과 회복을, 그리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 자의 비극을 동시에 마주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단지 돌아온 자를 축하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 바깥과 안쪽 모두에서 길을 잃은 인생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초점은 아들이 아닌 아버지에게 맞추어야하고, 탕자의 귀향을 기꺼이 받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자, 그럼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탕자의 추락과 결단, 집을 나선 자유는 집을 떠난 방황이었다

비유는 둘째 아들의 요구로 시작됩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눅 15:12) 이 말은 단순히 유산을 미리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는 곧 아버지를 죽은 자로 여긴다는 의미였습니다. 유산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보다 자신의 몫을 원했고, 관계보다 소유를 택했습니다.

헬라어 ‘우시아(οὐσία)’는 존재 자체, 또는 실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나누어 준 것은 단지 돈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떼어 주신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그것을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하게 씁니다. 여기서 ‘허랑방탕’은 헬라어 ‘아소토스(ἀσώτως)’로, 자기 통제 없이 흩뿌리는 삶, 분별 없는 낭비를 뜻합니다.

그는 자유를 원했지만, 곧 자율을 잃었고, 만족을 추구했지만 결국 결핍에 이르게 됩니다. 기근은 예기치 않은 현실을 상징합니다. 인간의 교만은 기근 앞에서 무너집니다. 그는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는데, 이는 유대인에게 가장 비참하고 부정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돼지와 함께 먹이를 먹고자 할 정도로 굶주린 그는, 결국 스스로를 돌아보며 말합니다.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눅 15:17)

그의 회복은 이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돌아오다’는 헬라어 ‘아나스타스(ἀναστὰς)’는 일어나다, 부활하다의 뜻도 있습니다. 그는 완전히 무너졌지만,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다시 아버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준비된 고백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 15:21) 이 고백은 단지 부끄러움의 표현이 아니라, 진심 어린 회개입니다. 자기 죄의 깊이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아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비춰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원한 적은 없는지, 하나님의 얼굴보다 손에 쥘 것을 요구한 적은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죄란 단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이며, 아버지를 죽은 자처럼 여기는 오만입니다.

아버지의 달려옴, 품음, 입맞춤: 수치 위에 덮인 은혜

탕자가 돌아오는 장면에서 우리는 이 비유의 가장 극적인 반전을 만납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눅 15:20)

여기서 ‘측은히 여겼다’는 말은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입니다. 내장을 움직이듯,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긍휼의 감정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귀환을 이처럼 깊이 반응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달려갑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 어른 남성이 달린다는 것은 체면을 버린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의 수치 위로 체면을 던져버립니다.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말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2)

제일 좋은 옷은 지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반지는 가족의 권한 회복, 신발은 종이 아닌 아들임을 상징합니다. 아버지는 단지 그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이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회복 선언입니다. 아들은 돌아온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눅 15:24) 고난주간에 이 말씀은 더욱 크게 울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극단적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고, 보았고, 달려갔습니다. 우리는 늘 늦게 도착하지만, 하나님은 늘 먼저 준비하고 기다리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기다림을 너무 자주 당연하게 여기며 삽니다.

잔치에 들어오지 못한 큰아들의 분노, 그러나 그는 집 안에 있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장 많은 오해와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인물, 큰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는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다, 잔치 소리를 듣고 종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화를 내고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거늘” (눅 15:28)

큰아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 안에 있었고, 그의 말을 따라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분노는 동생의 귀환에 대한 질투가 아니라, 아버지의 은혜가 공정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비롯됩니다.

“이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29) 이 말 속에는 계산된 신앙, 조건부 순종, 자기의 의가 뿌리 깊게 박혀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자녀로 살았지만, 종처럼 일해 왔습니다. 그의 공로는 회개의 기쁨보다 앞섰고, 그의 기준은 아버지의 기쁨을 가로막습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말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눅 15:31-32) 아버지는 아들의 논리를 반박하지 않고, 사랑의 질서를 회복시킵니다.

큰아들의 모습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그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회개하는 죄인에게 분노하는 자들. 오늘 우리도 교회 안에서 이 큰아들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헌신했기에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마음, 하나님 나라가 공정하지 않다고 여기는 분노. 그러나 그 마음이야말로 아버지의 집 안에서 길을 잃은 마음입니다.

결론

잃은 아들을 향해 달려간 아버지, 돌아왔지만 여전히 멀리 있는 큰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 누가복음 15장의 마지막 비유는 단지 감동적인 가족 재회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의 중심입니다.

고난주간,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다시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먼 나라에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아버지 집 안에 있으나, 여전히 아버지의 마음과는 거리가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돌아오는 탕자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큰아들도 모두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둘 사이의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회개하는 자를 끌어안고, 자기의 의로 멀어진 자를 설득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오늘도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잃은 자를 기다리시며, 다시 만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앞에선 어떤 조건도, 자격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한 걸음, 아버지를 향한 그 한 걸음이면 됩니다.


매일성경 3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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