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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4:25 - 14:35 묵상과 강해, 제자도

케리그마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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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무게, 십자가의 계산

누가복음 14장의 마지막 대목은, 하나님 나라의 은혜로운 초대를 마친 예수님께서 이제 따르려는 이들에게 분명한 조건을 제시하시는 말씀입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숫자에 감동받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 가운데 누가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지를 바라보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무게로 다가옵니다. 고난주간, 십자가를 묵상하는 이 시기에,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대가를 계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값없이 주어지지만, 제자도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은 돌연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 14:26)

 

표면적으로 보면, 가족을 ‘미워하라’는 이 말씀은 윤리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미워하다’는 말은 히브리식 표현으로, 단순한 감정적 혐오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전복을 의미합니다. 헬라어 ‘미세오(μισέω)’는 사랑하지 않다, 덜 사랑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장 사랑하는 것마저도 내려놓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제자의 첫 조건이 ‘사랑의 질서’를 새롭게 정립하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우상이 됩니다. 부모, 자녀, 배우자, 생명, 모두 귀한 것이지만, 그 어떤 것도 주님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도란 결국 “누가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의 문제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를 철저히 흔듭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가족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더 무겁게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제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내 계획, 내 안정, 내 미래를 예수님보다 더 아낀다면, 그 또한 걸림돌이 됩니다. 주님은 따르라 하시며, 그 길이 결코 가벼운 감동으로 시작될 수 없다고 못박으십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 계산된 헌신

이어서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이 구절은 단순한 고난의 상징이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가장 잔혹하고 치욕적인 사형 도구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청중에게 마치 “자기 무덤을 파고 따라오라”는 선언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지다’는 말은 헬라어 ‘바사조(βαστάζω)’로, 계속해서 지고 간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단회적 결단이 아니라, 날마다의 결단입니다. 오늘도 지고, 내일도 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는 무게. 그것이 제자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종종 외롭고, 이해받지 못하며, 자기중심적 삶을 거스르는 여정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를 덧붙이십니다. 하나는 망대를 세우려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하러 나가는 왕입니다. 이 두 사람 모두 ‘먼저 앉아 계산’합니다. 망대를 끝까지 지을 수 있는지, 전쟁을 감당할 수 있는 병력이 있는지. 제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계산 없이 덤벼들 수 없습니다.

 

‘계산하다’는 단어는 헬라어 ‘슈페리조(ψηφίζω)’로, 실제로 돌을 놓고 수를 세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무턱대고 감정적으로 따르려 하지 말고, 삶의 전 영역을 걸 수 있는지 냉철하게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열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단지 무리를 원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따를 제자를 찾으십니다.

 

오늘 우리 안에는 십자가의 헌신 없이 주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혜는 누리고 싶지만, 대가는 지고 싶지 않은 신앙.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33)

 

이 ‘버리다’는 말은 헬라어 ‘아포타소마이(ἀποτάσσομαι)’, 즉 떠나다, 작별하다 라는 뜻입니다. 제자도는 결국 자신과의 작별입니다. 내 소유, 내 권리, 내 자아와의 이별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그분을 따를 수 없습니다. 믿음의 여정은 우리 삶에 감동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그 무게가 너무 버거워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해도, 주님은 묵묵히 앞서 가시며 다시 묻습니다. 정말 이 길을 따르겠느냐고.

 

맛을 잃은 소금의 슬픔

예수님은 이 단락을 마무리하면서 ‘소금’의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눅 14:34)

 

소금은 고대 사회에서 보존의 역할을 했습니다. 부패를 막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맛을 잃은 소금은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입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바로 ‘본질의 상실’입니다.

 

‘맛을 잃다’는 말은 헬라어로 ‘모란테(μωρανθῇ)’인데, 이는 단순히 맛을 잃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리석어졌다는 뜻입니다. 즉 제자가 그 본질을 잃을 때, 그는 세상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는이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눅 14:35) 이는 유기된 제자도의 경고입니다. 제자가 제자다움을 잃으면, 그 삶은 하나님 나라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무서운 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날카로운 칼처럼 다가옵니다. 신앙생활이 오래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제자의 맛을 내고 있는가? 세상에서 부패를 막는 거룩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십자가 없는 복음, 헌신 없는 믿음, 자기 부인이 없는 열정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 교회는 더 많은 수보다 더 깊은 제자가 필요합니다. 외형보다 본질, 수치보다 신실함.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다시 찾고 계신 참된 제자의 모습입니다. 좁은 길, 그러나 생명의 길. 그 길에 들어서려면, 자기 소유를 계산하고, 마음의 무게를 재며, 주님보다 더 사랑했던 것들과 작별해야 합니다.

 

결론

누가복음 14장의 마지막 구절들은 마치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리는 우리의 제자됨을 직면하게 합니다. 가족보다, 자기 생명보다, 자기 소유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이는 단순한 감정의 호소가 아니라, 생명의 원리입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가 감격하는 이유는, 그분이 먼저 자신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미워하셨고, 자기 십자가를 지셨으며, 생명을 계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도 이 길을 걸을 수 있겠느냐?”

 

제자는 감동을 느끼는 자가 아니라, 계산하고 결단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보다 제자를 원하시며, 숫자보다 깊이를 바라보십니다. 오늘 우리도 들을 귀를 가지고, 다시 주님의 부르심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은 좁고 험하지만, 결국 생명의 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길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매일성경 3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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