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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1 - 13:21 주해 및 묵상

케리그마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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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처럼, 겨자씨처럼: 하나님 나라의 잔잔한 침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습니다. 고난주간의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질 무렵, 누가는 우리에게 몇 개의 장면을 연속적으로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3장 1절부터 21절까지, 이 본문은 고난의 길에서 주님이 마주하신 사람들, 그들의 고정관념, 종교적 위선, 그리고 그 안에서도 자라나는 하나님 나라의 조용한 움직임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회개 없는 삶, 재앙은 징벌인가?

1절부터 5절까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질문을 다룹니다. 누군가가 예수께 나아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과 함께 섞은 사건을 말합니다. 이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큰 충격을 준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되묻습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를 받았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다고 생각하느냐?” (눅 13:2)

사람들은 재앙을 곧 심판으로, 불행을 곧 죄의 결과로 해석하려는 본능적 경향이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러했고, 제자들도 맹인의 고통을 부모의 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3, 5)

헬라어로 ‘회개하다’는 단어는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입니다. 단순한 감정적 반성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전인격적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재앙을 심판의 결과로 몰고 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모든 이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강조하십니다. 재난이 누구에게 더 큰 죄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전쟁, 기후 재난, 개인적인 상실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다른 이의 죄를 추궁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상황 앞에서 내면의 방향을 묻습니다. 네가 지금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가? 네 삶은 회개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기다리시는 하나님

6절에서 9절까지는 비유 하나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지만, 3년을 기다려도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찍어버리려 하자, 포도원지기가 말립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눅 13:8)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그리고 넓게는 회개 없는 인류를 상징합니다. 열매 없는 신앙, 껍데기뿐인 종교, 변화 없는 회개를 주님은 책망하십니다. 하지만 그 책망 뒤엔 포도원지기의 간청이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는 단순한 중보자 이상으로, 우리를 위해 흙을 파고, 거름을 주며,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속히 심판하실 수도 있었지만,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주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오래 참으심이 우리에게는 은혜이고, 또한 경고입니다. 때가 찼을 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결국 찍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메말라버린 신앙, 외식적인 행위, 반복된 예배 가운데 열매가 없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긍휼이 있습니다. ‘내가 파고, 거름을 주리니…’ 그분은 아직도 일하고 계십니다. 말씀이 들리고, 기도의 자리가 열리고, 형제자매의 권면이 있는 것은,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붙드신다는 증거입니다.

안식일의 곡신(哭神), 굽은 여인의 해방

10절부터 17절까지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 굽은 여인을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18년을 귀신들려 아예 몸을 펼 수 없었던 한 여인,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던 이 존재를 예수님은 ‘부르사’ 말씀하시고, ‘안수’하십니다. (눅 13:12–13)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사탄에게 18해 동안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13:16)입니다. 이는 단순한 병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억압의 문제임을 말합니다. ‘매인 바 되다’는 ‘데오(δέω)’로, 단단히 결박당한 상태를 뜻합니다. 여인의 고통은 단순한 질병이 아닌, 사탄의 지속적 억압 아래 있었던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에 그 여인을 고치신 것을 두고 회당장은 분노합니다. ‘일하지 말라’는 율법 조항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박은 논리적이며 강력합니다. “너희가 다 안식일에도 각각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눅 13:15)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의 본뜻을 되살리십니다. 율법은 억압이 아니라 해방을 위한 것이며, 안식은 쉬는 날이기 이전에 회복의 날입니다. 바로 그날, 굽은 여인이 일어서고, 잊힌 자가 ‘아브라함의 딸’로 불리며, 구원이 실제로 선포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굽은 마음이 있습니다. 자신을 죄책감 속에 가두고, 하나님의 얼굴을 들지 못한 채 18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를 ‘부르사’, ‘말씀하시고’, ‘안수’하십니다. 그리고 곧장 우리는 일어납니다. 어쩌면 이 은혜 앞에선, 회당장의 분노보다 여인의 눈물이 더 큰 설득력을 가집니다.

누룩과 겨자씨, 하나님 나라의 침투

마지막으로 18절부터 21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둘 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지만, 확실하게 작용하며 결국 전체를 변화시킨다는 점입니다.

‘겨자씨’는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작은 씨앗으로 알려졌고, ‘누룩’은 밀가루 서 말(약 40리터)을 부풀게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겉으로는 초라해 보이지만, 조용하고 은밀하게 우리 안에 자라나고, 공동체를 변화시키며, 마침내 세상을 뒤흔듭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의 길은 한 알의 씨앗이 되어 땅에 떨어지는 여정입니다. 십자가는 그 작음의 절정입니다. 그러나 그 씨앗이 자라 온 세상을 덮을 나무가 되고, 그 누룩이 세상을 부풀릴 기쁨의 빵이 됩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말씀 한 줄, 눈물의 기도 한 마디, 이름 없이 흘린 헌신의 땀방울 하나가, 겨자씨처럼 자라고 누룩처럼 침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는 도구가 됩니다. 비록 때로는 자신의 삶이 아무 의미 없는 반복처럼 느껴지더라도, 주님은 그 안에서 생명을 틔우십니다.

결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보여줍니다. 회개 없는 삶의 끝, 열매 없는 신앙의 위험, 그리고 억압된 자를 일으키는 주님의 손길.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은밀한 나라의 확장, 보잘것없음 속에 담긴 구속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는 우리의 심령이 이 말씀 앞에서 다시 깊어지길 원합니다. 오늘 우리 안에 누군가의 굽은 등이 있고, 열매 없는 가지가 있으며, 작은 겨자씨 같은 믿음 하나라도 있다면, 주님은 그것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부르시고, 말씀하시며, 손을 얹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회개하고 열매 맺으며, 하나님 나라의 누룩으로 살아가야 할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바라건대, 이번 고난주간엔 단 한 번이라도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그 파묻힌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우리도 누룩처럼, 겨자씨처럼 이 땅에 작게 살아가되, 깊게 흔들고, 오래 남는 흔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누룩이 들어가기 전 반죽이 엎어졌다면, 다시 시작하십시다. 주님은 여전히 거름을 주고 계시니까요.


매일성경 3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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