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눅 20:27-40 사두개인 부활을 묻다
죽음 너머를 묻는 신앙 - 부활에 대한 질문과 생명의 대답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주간의 화요일은 예수님께서 수많은 질문을 받으신 날입니다. 그 질문들은 단지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것이었지만, 주님은 그 질문 속에서 진리를 선포하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더 깊은 묵상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자들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조롱하듯 부활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논리를 뒤흔드셨고, 죽음 너머의 세계를 생명의 시선으로 다시 열어주십니다.
이 본문은 단지 교리적인 논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을 믿는가, 아니면 이 땅만을 전부로 여기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신앙의 질문입니다. 고난주간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께서 "부활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논리를 이긴 변증이 아니라, 곧 다가올 십자가와 부활의 실체에 대한 선언입니다.
사두개인의 질문, 죽음으로 가둔 논리(눅 20:27-33)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유대 종파입니다. 이들은 모세오경만을 권위로 인정했고, 영혼이나 천사, 부활 같은 개념을 거부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상한 가정을 던집니다. 어떤 여인이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했지만 모두 자식 없이 죽었고, 결국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입니다(눅 20:27-33).
이 질문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웃고,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의 논리를 죽음 안에 가두고, 생명을 조롱하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질문 너머에 있는 진짜 필요를 보십니다. 그들은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 여겼고, 그러므로 살아 있는 지금만이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논리를 해체하시며, 시간과 존재의 경계를 넘어 부활이라는 영원의 시선을 열어 주십니다.
다른 세계, 다른 질서(눅 20:34-36)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눅 20:34-35). 부활 후의 세계는 단순히 이 세상의 연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질서를 가진 세계입니다.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육체적 결혼의 제도가 필요 없는, 전혀 새로운 존재의 방식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주님은 그 다음 말씀에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들과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눅 20:36). 이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부활은 단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로 덧입는 것입니다. 부활은 단지 연장된 삶이 아니라, 변화된 삶이며,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영원한 신분의 전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고난주간을 지나며 십자가의 어둠을 묵상하지만, 그 어둠은 부활의 새벽을 위한 준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계시지만, 그 길 끝에서 부활이라는 영원한 빛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걸으십니다. 그리고 오늘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너는 죽음을 끝이라 보느냐? 아니면 시작이라 믿느냐?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눅 20:37-38)
예수님은 이제 모세의 글로 돌아가 그들에게 반문하십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모세도 가시 떨기나무 떨에서 주라 칭하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 20:37-38).
여기서 예수님은 놀라운 신학적 전환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단지 존재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지금 이 땅에 없지만, 하나님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라는 선언입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은 그 말씀을 삶으로 증명하시기 위해 십자가로 나아가십니다. 그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 있을 때, 어떤 죽음도 우리를 삼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존재는 죽음조차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의 신앙, 오늘을 다르게 산다(눅 20:39-40)
예수님의 이 말씀 앞에서 섣불리 질문하던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눅 20:39-40). 이 대답은 단지 논리를 잠재운 것이 아니라, 마음을 두드린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을 믿는 신앙은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늘을 다르게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전부라고 여기지 않기에, 더 깊은 사랑을 하고, 더 큰 용서를 하고, 더 넓은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은 이 생명력 있는 신앙을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시며 부활을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십자가로 증명하시고, 무덤을 이기시며 입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부활의 언약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죽음을 비웃던 사두개인들의 질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 너머로 생명의 주 되신 예수님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눅 20:38). 그 말씀은 오늘도 살아 있는 생명의 언약입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며, 우리는 그 십자가 너머의 생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를 믿기에, 오늘을 더 충만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기에, 지금의 고난도 헛되지 않음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을 넘어서는 신앙, 생명으로 연결되는 존재, 부활의 자녀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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