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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묵상, 눅 19:45-46 성전청결

케리그마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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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분노, 사랑의 뒤집기 -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 하신 날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주간 셋째 날,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장면을 마주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단순한 예배의 장소를 넘어,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이 머무는 지성소요, 신앙의 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공간이 장사꾼들의 거래소로, 이익과 탐욕의 무대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타락한 성전의 한복판에서 상을 뒤엎으시고, 의로운 분노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눅 19:46).

이 날의 사건은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닙니다. 이는 고난주간의 흐름 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는 그 구속사의 여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 분노는 파괴가 아니라 회복의 분노이며, 정죄가 아니라 정화의 외침입니다. 그 거룩한 분노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봅니다. 주님은 우리 안의 성전,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깨끗이 뒤엎기를 원하십니다.

 

무너진 기도의 자리(눅 19:45)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십니다(눅 19:45). 본래 성전은 기도의 장소였고, 열방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제사장들의 탐욕과 종교 권력의 결탁으로 인해 상업화되고, 영적 생명력을 잃어버린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장사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타락을 지적하십니다. 기도 대신 거래, 경배 대신 계산이 자리 잡은 그 공간은 더 이상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성전이라는 거룩한 외피 속에 이익의 본질이 감춰져 있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거래로 환산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허상을 보셨고, 더 이상 침묵하실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분노는 바로 이 점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경건한 외형 속에 이기적 목적만 남았을 때,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심령 성전에 들어오셔서 그 상을 뒤엎으십니다.

기도하는 집에서 강도의 소굴로(눅 19:46)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눅 19:46, 사 56:7, 렘 7:11). 이 말씀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통렬한 심판 선포입니다. 기도하는 집, 곧 하나님과 교제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신앙의 탈을 쓰고 하나님을 도둑질하고 있었다는 고발입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공생애 처음에도 있었고, 고난주간에도 다시 반복됩니다(요 2:13-17, 마 21:12-13). 이는 단순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을 동시에 상징하는 선지자적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행동하십니다. 무너진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시기 위해, 성전을 흔들고 사람들의 영혼을 깨우십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론 예배하고 기도하지만, 내면은 돈, 성공, 인정이라는 우상으로 가득 찼다면,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을 흔들어 회복시키길 원하십니다. 때로 그 흔들림은 아프고 낯설지만, 그 뒤엔 반드시 치유와 새로움이 찾아옵니다. 주님은 거룩한 분노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분노는 파괴가 아니라 회복의 첫걸음입니다.

성전 정화와 십자가의 그림자

이 사건은 단순히 성전을 정리하신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로 가는 길 위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 드러내신 선언입니다. 성전은 곧 예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요 2:19). 예수님은 장차 십자가에서 찢기실 자기 몸, 곧 참된 성전이 되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 하신 그 날은, 인간의 죄와 위선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가리고 있었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해야 할 장소가 인간의 욕망으로 더럽혀졌고, 그 더러움은 결국 예수님의 몸으로 쏟아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 더러움을 대신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죄악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의 청결은 결국, 십자가의 정결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성전이 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제는 건물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성전이 되었습니다(고전 3:16).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성전은 깨끗한가요? 우리의 마음은 기도하는 집입니까, 아니면 이기심으로 가득 찬 장터입니까?

뒤엎으시는 사랑

주님은 뒤엎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의 상,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 인간의 욕망이 걸터앉은 모든 구조를 뒤엎으셨습니다. 그 뒤엎음은 단순한 파괴가 아닙니다. 그건 사랑의 행동입니다.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너무 귀하기 때문에 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무 아끼시기에 뒤엎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사랑을 부드럽고 따뜻한 모습으로만 기대하지만, 때로 그 사랑은 칼 같고 망치 같고 불 같습니다. 그 불이 타올라야 진짜 금이 드러나고, 그 망치에 깨져야 진짜 돌이 나옵니다. 우리의 성전이 정결해지는 그 과정은 결코 유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 구속의 신비가 흐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상을 뒤엎으십니다. 뒤엎음이 없다면 회복도 없습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전을 뒤엎으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고난주간 셋째 날, 주님은 우리의 마음 성전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곳은 기도하는 집이냐? 아니면 강도의 소굴이냐?"

우리의 영혼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거래와 계산입니까? 아니면 교제와 기도입니까? 주님은 오늘도 상을 뒤엎으십니다. 그 뒤엎음은 회복의 시작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깨뜨리십니다. 그리고 다시 세우십니다.

이제 우리도 그분의 뒤엎으심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고난주간의 십자가는 바로 그 회복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너진 성전을 회복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찢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참된 예배와 기도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눅 19:46). 주님의 이 외침이 오늘 우리의 심령에도 들려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거룩한 뒤엎음으로, 정결한 회복으로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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