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막 11:20-21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
말라버린 뿌리, 드러난 진실 - 무화과나무와 고난주간의 거울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주간의 화요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제, 성전을 청결케 하시며 의로운 분노로 거룩을 회복하셨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 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길목에서 제자들이 어제의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본문은 매우 짧습니다. 그러나 그 짧음 속에 엄청난 구속사적 깊이가 숨어 있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라삐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막 11:20-21).
이 장면은 어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결과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단지 가지가 시든 것이 아니라, 뿌리째 말랐다고 기록합니다. 겉으로는 무성했던 나무, 그러나 열매는 없었던 그 나무는, 결국 뿌리부터 완전히 마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장면을 통해 고난주간의 주제를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키십니다. 겉모습의 신앙이 아니라, 뿌리 깊은 내면의 진실함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고난주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을 비추는 거울 같은 본문입니다.
뿌리째 마른 나무(막 11:20)
제자들이 지나가다가 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무화과나무가 완전히 말라버린 것을 봅니다. 그저 잎이 마른 정도가 아니라, 뿌리째 말라버렸습니다(막 11:20). 이는 자연스러운 고사가 아닙니다. 말씀이 선포되자 곧 그 말씀대로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창조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판의 불칼이 되어 뿌리를 드러내고 그 끝을 말리기도 합니다.
이 장면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가 바로 '뿌리째'입니다. 이는 단지 외적인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 실패를 말합니다. 그 나무는 열매를 맺을 가능성조차 사라졌습니다. 겉으론 푸르러 보였지만, 생명의 실체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유대 사회의 신앙 상태였고, 오늘 우리 신앙의 민낯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주 외형적인 신앙으로 만족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찬송을 부르고, 교회 안에서 경건해 보이는 모습을 유지하면서, 정작 뿌리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신앙을 붙들고 있을 수 있습니다.
기억하는 제자, 깨닫는 교훈(막 11:21)
베드로가 이 장면을 보며 어제의 사건을 떠올립니다. 그는 말합니다. "라삐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막 11:21). 이 짧은 말 속에는 두 가지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놀람이고, 또 하나는 경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경외, 그리고 무성했던 나무가 순식간에 말라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향하는 방향은 회복일 수도 있고, 심판일 수도 있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회복이 아니라 심판의 상징이 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반응하지 않는 자에겐 결국 뿌리째 마름이라는 심판이 찾아옵니다.
이것은 위협이 아닙니다. 이것은 경고를 통한 자비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묻고 계십니다. “너는 열매를 맺고 있느냐?” 오늘도 말씀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겉모습을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뿌리의 신앙과 고난의 열매
고난주간은 신앙의 뿌리를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기는 단지 예수님의 고난을 회상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 고난이 왜 필요했는지를, 내 삶 안에서 되짚어보는 성찰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뿌리째 마른 나무를 통해, 인간 내면의 거짓과 위선을 꿰뚫으셨고, 동시에 그 거짓을 대신 짊어지기 위해 십자가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입니까? 회개의 열매, 용서의 열매, 사랑과 인내의 열매, 그리고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이 열매는 뿌리에서부터 하나님의 생명으로 연결될 때에만 가능합니다. 아무리 화려한 잎사귀라도, 뿌리가 썩어 있다면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바라보시는 것은 외형이 아니라, 뿌리입니다.
고난주간의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생명나무가 되어 우리에게 열매를 먹이시기 위해, 모든 생명의 근원을 자신 안에 담으신 채 골고다를 향해 걸어가고 계십니다. 그분의 뿌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깊이 닿아 있었기에, 버림받음과 조롱, 채찍과 죽음조차 그분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뿌리에 접붙여져야만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다시 살아날 수 없는 뿌리, 그러나 우리에겐 소망
뿌리째 마른 무화과나무는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신 것이 아니라, 죽으심으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장면은 오히려 반어법적인 희망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마르지만, 그 마름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스스로 마르지 않기 위해 십자가로 나아가십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다시 뿌리 내릴 수 있는 은혜의 땅을 열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지금 어디에 뿌리내리고 있습니까? 전통과 관습, 사람의 인정, 종교적 활동 위에 뿌리내린 신앙은 고난의 바람 앞에서 쉽게 마르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 뿌리내린 신앙은 어떤 메마름 속에서도 꺾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십니다. 뿌리로부터 새로워지라고, 뿌리로부터 열매 맺으라고, 뿌리로부터 다시 살아나라고.
마무리 묵상
베드로는 무화과나무를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 마름 앞에 서서 단지 놀라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신앙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뿌리로부터 나를 향해 살아 있으라.”
고난주간의 이 화요일 아침,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뿌리를 건드리십니다. 말씀이 심판일 수도 있지만, 회복의 시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뿌리가 주님께 붙어 있다면, 그 어떤 광야 속에서도 우리는 마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막 11:20), 오늘 아침, 우리 안의 무화과나무는 어떤 모습입니까? 그 질문 앞에 진실하게 서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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