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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묵상 마 21:1-11 예루살렘 입성

케리그마 2025.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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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 그러나 십자가 - 종려나무 가지 뒤에 숨은 십자가의 길

형제자매 여러분, 고난주간의 첫날인 종려주일이 밝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고난주간의 문을 엽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날을 기쁨의 날로만 기억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환호, 종려나무 가지, 길에 펼쳐진 겉옷, "호산나"의 외침. 그 모든 풍경은 마치 왕의 개선 행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단지 화려한 입성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장면은 고난과 죽음을 향한 결정적인 발걸음이며, 하나님 나라의 왕이 세속적 기대를 뒤엎고 어떤 길을 택하셨는지를 선명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마치 햇빛 뒤에 서린 먹구름처럼, 종려가지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해 봅싣다.

왕이 나귀를 타시다(마 21:1-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러 두 제자를 보내시며 나귀와 그 새끼를 가져오라 하십니다(마 21:1-3).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장면을 마주합니다. 이 장면은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는 순간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이르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이 예언의 성취는 왕으로서의 권위와 함께 겸손과 평화의 상징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왕 되심을 선언하십니다. 말이 아닌 나귀를 타신 것은 힘과 정복이 아닌, 낮아짐과 섬김의 왕권을 보여줍니다. 이는 고난주간의 시작점에서 우리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메시아는 세속적 힘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져 고난을 감당함으로써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구속사적 전환의 시작입니다.

 

백성들의 환호와 오해(마 21:6-11)

제자들은 나귀를 끌고 와서 예수님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고, 무리는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며,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며 예수님을 맞이합니다(마 21:7-8). 그리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들이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

그러나 우리는 이 장면에서 진한 비극의 기운을 느낍니다. 그들의 외침은 사실상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 로마의 압제를 깨뜨릴 혁명가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호산나"는 본래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외침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의미는 그들이 바라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들이 며칠 후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마 27:22-23) 외칠 것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기대와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 사이의 깊은 간극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주간의 긴장을 봅니다. 겉으로는 환호하지만, 마음은 십자가를 외면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야를 원했지, 고난받는 종의 형상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 속 "호산나"는 정말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바라는 결과만을 구하는 외침은 아닙니까?

 

예언의 발걸음과 순종의 고난(마 21:10-1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성 전체가 소동합니다. "이는 누구냐?" 사람들이 묻고, 무리는 말합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마 21:10-11).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 긴장을 목격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았지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며 자신의 죽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선지자를 죽이는 곳이었습니다(마 23:3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그 도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신 예수님의 발걸음은 인간의 반역을 사랑으로 덮으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결단입니다. 그는 예언의 성취로, 구원의 드라마를 향한 무대 위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종려주일, 십자가를 보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려주일은 기쁨의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통곡의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날의 환호 속에 숨은 오해와 배반, 그리고 십자가의 진실을 보아야 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것은 고통의 골고다 길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기꺼이 걸으셨고, 우리는 이제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고난주간은 단지 예수님의 고난을 회상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지날 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다면 우리 삶에도 십자가가 드러나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사랑이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며,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구속의 깊이를 깨닫고, 그 안에서 진정한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게 됩니다.

 

마무리

오늘 종려주일, 우리는 다시금 자문해 봅니다. 나의 호산나는 진실한가? 나는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을 어떤 방식으로 영접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마음의 예루살렘 문 앞에 서 계십니다. 그는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칼이 아닌 십자가를 지시고, 왕관이 아닌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그 길을 가십니다.

우리는 이제 그분과 함께 고난주간을 걷게 됩니다. 매일의 발걸음마다 그분의 고난을 묵상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도 그분의 제자로서 좁은 길을 따릅니다. 고난주간은 곧 사랑주간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안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한 주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이 외침이 우리 마음 깊은 곳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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