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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묵상, 마 26:47-56 유다의 배반의 키스

케리그마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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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검은 밤, 사랑의 체포(마태복음 26:47-5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의 심장부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오늘 본문,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시는 장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피처럼 쏟은 기도의 밤은 지나가고, 이제는 배신과 체포, 그리고 십자가를 향한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도망치지 않으셨습니다. 숨지 않으셨고, 저항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스스로를 내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밤, 칼과 몽둥이가 가득한 어둠 속에서도 오직 사랑으로 서 계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려 합니다. 그분은 대적들의 손에 넘겨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고, 우리를 위해 체포되심으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

배신의 입맞춤, 애증의 상징(마 26:47-49)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그 순간, 검과 몽둥이를 든 무리가 들이닥쳤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낸 자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유다가 앞장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예수께 다가와 말합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며 입을 맞춥니다(마 26:49).

여러분, 이 장면은 단지 배신의 상징으로만 보기에 너무도 고통스럽고 비극적입니다. 입맞춤은 유대 문화에서 친밀함, 존경,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것을 배신의 신호로 사용했습니다. 가장 친밀한 제스처가 가장 깊은 배반의 도구가 되는 순간, 사랑은 뒤틀리고, 믿음은 조롱당하며, 진리는 매도당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도 유다에게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고 하십니다. 여기서 '친구'라는 단어는 히브리적 맥락에서는 공적 거리감 없이 친밀함을 내포하지만, 예수님의 음성에는 오히려 유다에 대한 깊은 슬픔과 사랑이 서려 있습니다. 그분은 그 순간에도 유다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배신자를 향한 마지막 호명 속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칼을 든 제자와 내려놓은 메시아(마 26:51-52)

예수님이 잡히시던 순간, 함께 있던 제자 중 하나가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립니다(마 26:51). 요한복음에서는 이 제자가 베드로였다고 밝히고 있지요. 그의 행동은 인간적으로는 지극히 이해됩니다. 사랑하는 스승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대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꾸짖으며 말씀하십니다. "네 칼을 도로 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이 말씀은 단순히 무력 사용에 대한 금지가 아닙니다. 이는 구속사적 질서에 대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칼과 권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 순종과 용서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칼을 휘두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고, 그 선택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구세주는 무기를 드신 전사가 아닙니다. 그분은 그 어떤 보호막도 없이, 오히려 자신을 해체함으로 세상을 살리신 분입니다. 그분의 힘은 드러내는 데 있지 않고, 내려놓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체념이 아니라 사랑의 결단이었고,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향한 전적인 동의였습니다.

하늘 군대를 멈추게 한 말씀의 권위(마 26:53-54)

그 순간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그렇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셨습니다. 천만 군대를 불러 세상 모든 원수를 멸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러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 26:54). 주님은 당신의 고난과 죽음이 성경을 성취하는 구속의 길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끄는 자가 아니라 따라가는 자의 자리를 택하셨습니다. 순종은 약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가장 강한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고통의 절정임을 아셨지만,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의 절정임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군대를 멈추셨고, 대신 하나님의 말씀의 줄을 따라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운명에 순응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향한 능동적인 순복입니다.

제자들의 도망, 그분의 홀로 남음(마 26:55-56)

마지막으로 주님은 체포하는 무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마 26:55). 이는 진리를 향한 세상의 모순된 대응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은혜를 베푸신 분께 칼을 들이대는 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 26:56). 이 짧은 구절은 너무나 깊은 슬픔을 담고 있습니다. 함께 걷겠노라 외쳤던 이들이 다 떠나고, 주님은 홀로 남으십니다. 그러나 그 홀로됨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시는 메시아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밤에 혼자가 되심으로, 우리 모두를 동행자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셨지만 물러서지 않으셨고, 배신을 당하셨지만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우리가 따르는 구세주의 길이며, 고난주간에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복음의 심장입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체포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배신당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칼과 몽둥이 사이에서, 그분은 평화를 택하셨고, 혼자 남으심으로 우리 모두를 품으셨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며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이 겪으신 이 검은 밤을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걸음을 따라 침묵 속에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칼을 내려놓고, 말씀을 붙들며, 그분의 순종 안에서 나의 불순종을 회개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여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이 고난은 성경을 완성하는 순종의 여정이었고, 그 중심에 사랑으로 서 계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발자국을 따라, 오늘도 우리는 다시금 결단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십자가의 그 길을, 피하지 않고 따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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