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마 26:57-68, 재판 받으시는 창조주
침묵 속에 울려 퍼지는 진리(마태복음 26:57-6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신문당하시는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겟세마네에서 체포되신 주님은 밤새 결박된 채로, 거짓과 음모가 뒤섞인 재판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그것은 법이 무너진 장소였고, 정의가 실종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법정에서 주님은 거짓에 휘둘리지 않으시고, 침묵으로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를 향한 여정은 이제 예언의 실현으로, 구속의 드라마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삼키심으로 우리를 위한 입막음을 당하셨고, 온갖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사랑의 언어로 우리를 감싸주셨습니다.
밤의 법정, 불의가 자리를 잡다 (마 26:57-59)
예수님은 붙잡히신 후,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그곳엔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이미 모여 있었습니다. 이른바 산헤드린 공회였지요. 이들은 겉으로는 율법의 수호자를 자처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한 자들이었습니다. 공정한 재판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거짓 증인을 찾고 있었습니다(마 26:59).
밤에 열린 재판, 그것도 체포 직후 바로 진행되는 이런 신속한 재판은 당시 유대 율법에도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의는 늘 정의의 외형을 뒤집어쓰고 등장합니다. 오늘날에도 진리 앞에 선 하나님의 사람들이 조롱당하고, 권력 앞에서 정의가 무너지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불의한 법정에서, 하나님의 계획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불법적인 재판의 심장부에 계셨고, 아무 말씀 없이 모든 고소를 받아들이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억울함을 토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아시는 침묵의 능력이었습니다.
거짓의 입술과 왜곡된 정의(마 26:60-61)
공회는 증인을 세웠지만, 아무도 예수님을 정죄할 만큼 일치된 증언을 하지 못했습니다. 마가는 이 장면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서로 일치하지 못하더라"고 기록합니다. 그때 두 사람이 나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
여러분,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주님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하셨는데, 그 말씀이 가리킨 것은 육체로 오신 예수님의 몸, 곧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문자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주님을 성전 모독자로 몰아가려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지금도 말씀을 오해하고 왜곡합니다. 진리는 종종 자기 이익에 따라 해석되고, 하나님의 음성은 불편하다는 이유로 침묵당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진리는 묵살당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는 왜곡될수록 더욱 그 본질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조롱을 당했지만, 그 말씀이야말로 곧 실현될 십자가와 부활의 예고였습니다.
침묵하시는 메시아, 말씀하시는 구세주(마 26:62-64)
대제사장이 나섭니다.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마 26:62)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이 침묵은 피동적인 수난이 아니라, 능동적인 순종의 언어입니다. 그는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고난받는 종,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잠잠한 자”(사 53:7)로 서 계십니다.
그러다 마침내, 대제사장이 핵심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 그때 주님은 드디어 입을 여십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이 고백은 단순한 자기 진술이 아닙니다. 이는 종말의 심판자 되신 인자의 선언이며, 하나님의 구속사가 이 재판을 통해 마침내 정점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밝히는 예언입니다. 그분은 지금 잡히신 분이지만, 언젠가는 심판하실 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침묵을 뚫고 터져 나온 이 한 문장은, 역사의 방향을 거스르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진리의 검이었습니다.
찢어진 옷과 내어던져진 주님의 얼굴(마 26:65-68)
대제사장은 옷을 찢으며 신성모독을 선언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죽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니라, 참을 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분을 신성모독자로 몰아세우고, 마침내 "그는 죽어야 마땅하다"고 결론 내립니다(마 26:66).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며, 손바닥으로 때립니다. 그들은 조롱합니다.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마 26:68)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이 사람의 손에 의해 짓밟히는 장면을 봅니다. 그러나 이 수치와 모욕의 얼굴은 결국 우리를 향한 사랑의 얼굴입니다. 침묵하신 예수님의 입은 우리를 위한 변호가 되었고, 맞으신 그 얼굴은 우리의 영광을 위한 수치였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고난주간의 정수에 다가섭니다. 주님의 침묵은 그분의 무능함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진리는 외면당했지만, 십자가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구속사는 조금도 늦어지지 않고 완성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거짓의 법정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영원한 진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모욕당하셨지만, 그 모욕을 통해 영광의 길을 여셨고, 침을 맞으셨지만, 그 자리에 우리를 위한 구속의 문이 열렸습니다.
이 고난주간을 보내며 우리가 할 일은, 침묵하시는 주님의 뜻을 듣는 일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지 않으셨을 때에도, 그분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침묵은 사랑의 깊이요, 그분의 고난은 구원의 확증입니다.
십자가는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가야바의 법정에서, 조롱과 침 속에서 이미 피어나고 있던 하나님의 구속사였습니다. 주님은 모든 불의 앞에 침묵하셨지만, 그 침묵이 우리를 위한 가장 강력한 응답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침묵 앞에 무릎 꿇고, 그분의 사랑 앞에 입을 다뭅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침묵 속에 저를 품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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