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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묵상, 마 27:11-31 모욕 당하시는 예수님

케리그마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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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피멍의 왕(마태복음 27:11-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의 여정이 깊어지는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의 침묵과 조롱, 채찍질과 피멍의 시간을 지나가야 합니다. 주님은 왕이셨지만, 면류관 대신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예언자셨지만, 예언의 입은 침묵하셨고, 구원자셨지만, 구원받을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1절부터 31절까지의 본문은 단지 십자가 전 단계가 아니라, 구속사의 중심으로 향하는 어두운 계단입니다. 우리는 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그분의 고난이 얼마나 치밀하게 예언되었고, 얼마나 철저히 순종 가운데 이루어졌는지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군중의 함성 속에서 조롱받으셨고, 로마 병사들의 장난감처럼 다뤄졌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침묵의 대서사시를 써내려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맞이하신 새벽은 결박과 모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가 침묵의 결단이었다면, 빌라도 앞에서의 침묵은 고난을 받아들이는 신적인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죄인으로 몰아세우지만, 주님은 당신의 무죄를 변호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의 의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불의를 짊어지심으로 의를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침묵의 위엄, 참된 왕의 얼굴(마 27:11-14)

예수님께서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서셨을 때, 그분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아닌 위엄이 서려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 이 질문은 정치적 시비를 가리는 것 같지만, 사실상 신학적인 본질을 묻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대답하십니다. “네 말이 옳도다.” 그리고 그 이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거짓 고소를 쏟아부어도,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마 27:12).

그 침묵은 놀라운 힘을 지녔습니다. 고통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순종의 결정체이며, 복수나 정당성을 요구하지 않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와 같이, 주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자신의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사 53:7). 누구도 그분을 지지해주지 않았고, 그 어떤 항변도 없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누군가 나서서 변호해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방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침묵으로 자신의 무죄를 외치셨습니다. 침묵 가운데 사랑을 완성하시고, 고난 가운데 순종을 이끄신 주님은 우리를 구속하신 왕이셨습니다.

무죄한 자를 죄인으로 내모는 군중의 소리(마 27:15-23)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전통에 따라 백성들에게 죄수 하나를 놓아주려 합니다. 그는 바라바라는 살인자와 예수님을 놓고 선택을 맡깁니다. 하지만 군중은 외칩니다. “바라바를 놓아주소서.” “이 사람은 죽이고 바라바는 놓아주소서.” (마 27:21)

여러분, 이 장면은 비단 고대 유대인들의 타락한 결정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인류 전체의 비뚤어진 선택의 본성, 죄를 택하고 의를 배척하는 인간 내면의 비극을 고발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셨지만, 세상은 의를 싫어했고, 대신 악을 택했습니다. 바라바는 단지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마다 예수님은 바라바 대신 채찍을 맞으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바라바였던 것입니다.

군중의 외침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거칠어지고, 빌라도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민심의 폭력에 떠밀려, 스스로 판단을 포기하고, 정의를 포기한 채 다수의 소리에 굴복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마 27:23)고 반문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함성뿐입니다. 악은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처형하려는 세상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게 거칠고 무분별합니다.

손 씻는 빌라도와 피를 뒤집어쓰는 백성(마 27:24-26)

결국 빌라도는 물을 가져오게 하고, 손을 씻으며 말합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손을 씻는다고 죄책이 사라질까요? 아닙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무책임한 무죄 선언을 남긴 자가 됩니다. 손을 씻음으로 그는 죄로부터 도망치려 했지만, 오히려 그 죄는 더 선명하게 기록됩니다.

백성들은 말합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 이 말은 저주의 말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구원의 문이 됩니다. 예수님의 피는 그들을 정죄하기 위해 흘려진 것이 아니라, 그들을 씻기기 위해 흘려진 피였습니다. 그들은 심판을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그 심판을 자비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의 피는 인간의 선언을 초월해 우리를 정결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라바가 풀려납니다.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하십니다. 그 채찍질은 단순한 고통을 넘어, 구속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피는 첫 열매로서, 우리를 위한 속죄의 예물이 되었습니다.

병사들의 조롱과 왕의 얼굴에 드리운 피(마 27:27-31)

이제 병사들의 조롱이 시작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려 왕의 모양을 흉내 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조롱하며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마 27:29). 이 조롱은 인간이 진리를 향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주님은 입술로 답하지 않으시고, 얼굴로 견디십니다. 뺨을 맞고, 침을 맞고, 머리를 맞으시면서도, 그분의 눈은 여전히 자비로 가득했습니다. 그 고통은 인류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였고, 그 인내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시관은 단순한 조롱의 도구가 아니라, 인류의 죄를 상징하는 면류관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로 만든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우리를 위해 저주의 자리로 나아가셨습니다. 그 갈대는 조롱의 왕홀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온 세상의 왕이 십자가로 다스리실 때 들고 계실 겸손의 지팡이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진정한 권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분은 끝까지 우리를 알아보셨고, 사랑하셨습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마주한 주님은 침묵하신 왕이셨고, 조롱당한 구원자셨으며, 피 흘리신 대속자이셨습니다. 그분은 말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고, 우리를 위해 억울함을 감당하셨으며,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죄인처럼 죽으셨습니다.

오늘 그 침묵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그 피멍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주님의 침묵은 우리가 용서를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고, 주님의 채찍은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은혜의 문을 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며, 그 침묵을 듣고, 그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도 다시 고백합시다. “주님, 제가 그 자리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저를 대신하셨습니다. 제가 바라바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그 피가 저를 살렸습니다.”

그 고백이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침묵 속에 머물지 않아도 됩니다. 그 침묵은 이미 진리를 선언했고, 그 진리는 우리를 부활의 아침으로 이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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