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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묵상, 마 27:32-56 십자가의 길을 가다

케리그마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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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그 위에 흐른 모든 사랑(마태복음 27:32-5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섭니다. 고난주간의 절정이며, 인류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절규처럼 터져 나온 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로 향하시던 그 걸음은 단순한 순교의 발걸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구속의 시간 속에 오랫동안 준비된 사랑의 완성이었습니다. 고통은 거칠었고, 조롱은 야만스러웠으며, 침묵은 깊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엉켜 있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인류를 위한 유일한 길을 여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2절에서 56절은 그분의 피와 숨결, 마지막 음성과 심장 박동까지도 구속의 언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고자 하는 결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지는 이름 없는 순례자(마 27:32)

예수님께서는 심한 채찍질과 조롱을 당하신 후, 골고다로 향하셨습니다. 그분의 몸은 이미 고통으로 무너졌고, 어깨는 더 이상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마 27:32).

여러분, 이 장면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구레네 시몬은 성경 어디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다뤄지지 않지만,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의 섭리에 붙들린 자로 기록됩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이토록 영광스러운 순간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이 구절에서 배웁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구속의 무게를 홀로 지고 가시되, 동시에 우리의 어깨에도 동행의 상징으로 그 십자가의 일부를 얹어주십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께 속한 것이지만, 그 길에는 동행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시몬처럼 억지로 끌려온 자 같지만, 주님의 시선 안에서는 반드시 기억될 이름입니다.

쓸개 탄 포도주와 벌거벗긴 왕의 고통(마 27:33-37)

골고다, 해골의 장소에 도착했을 때, 군병들은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드리려 합니다(마 27:34). 이는 고통을 줄이는 일종의 마취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맛만 보시고 마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고난을 온전히 마시려 하셨고, 십자가의 잔을 끝까지 감당하시려 하셨습니다.

그 후,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눕니다(마 27:35). 이 수치는 곧 구약 시편의 예언을 성취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18). 왕이신 예수님은 아무것도 걸치지 못한 채,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나셨습니다. 벌거벗긴 몸은 육체의 고통을 넘어, 인류의 죄악을 대신 감당하신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가 붙었습니다(마 27:37). 아이러니하게도, 이 조롱의 문구는 진리였습니다. 그분은 왕이셨습니다. 다만 그 왕권은 세상의 힘이나 위엄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과 희생으로 나타났습니다.

조롱받는 구원자와 십자가의 역설(마 27:38-44)

그분의 양편에는 강도 둘이 못 박히고, 지나가는 자들과 제사장들,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네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더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가장 깊은 역설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분이 내려오지 않으셨기에, 우리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분이 자신을 구하지 않으셨기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실패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가장 깊은 승리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은 말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마 27:42). 그 말은 절반의 진실이 아니라, 완전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신 이유가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구세주를 보며, 인간의 논리를 넘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부르짖음의 신학(마 27:45-56)

정오부터 오후 세 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합니다(마 27:45). 자연이 침묵하고, 피조물이 고개를 숙입니다. 세상의 주인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고 있는데, 피조세계가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였습니다(마 27:46).

이 외침은 단순한 절망의 소리가 아닙니다. 이는 시편 22편의 인용이며, 하나님께 철저히 버려진 자로서 죄인들의 자리에 서신 메시아의 신학적 선언입니다. 주님은 이 외침 속에, 죄로 인해 단절된 인류의 운명을 끌어안고,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하실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외침을 듣고 엘리야를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신 후, 영을 거두십니다(마 27:50). 이 마지막 숨결은 패배의 한숨이 아니라, 구속의 완성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순간을 “다 이루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우리의 생명이 되었고, 그분의 침묵은 우리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집니다(마 27:51). 이는 단지 성전의 구조물의 파괴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이 무너졌다는 상징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제도, 제사장의 중보는 이제 십자가의 주님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무덤이 열립니다(마 27:52-53). 주님의 죽음이 곧 생명의 문을 연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백부장이 외칩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놀랍게도, 가장 먼저 이 고백을 한 자는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인이었습니다. 그 외침은 모든 민족과 족속에게 열려 있는 복음의 확장을 예고하는 선언이었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던 여인들은 그 순간을 목격합니다(마 27:55-56). 그들은 끝까지 십자가 곁에 남아 있었고, 고통 가운데 죽어가시는 주님의 얼굴을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새벽에 다시 그분을 만나게 될 자들이었습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눈물과 피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은혜와 구속의 정점입니다. 예수님은 억울하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발적으로 그 길을 걸으셨고, 기꺼이 우리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분은 저주를 끌어안고 축복으로 바꾸셨으며, 버림을 받아 우리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고난주간의 이 시간, 우리가 그분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면, 우리가 십자가 앞에 머물 수 있다면, 그 자리가 곧 회복의 자리이고, 새 생명의 자리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너를 위한 것이다.”

주님의 그 음성 앞에 다시 무릎 꿇고 고백합시다. “주님, 제 삶을 다시 드립니다. 제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만이 저의 구원자이십니다.”

그 고백 위에, 주님의 보혈이 오늘도 새 생명을 심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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