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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설교, 요 20:11-18 마리아야

케리그마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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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요한복음 20:11-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주일의 아침, 우리는 여전히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덤은 더 이상 닫혀 있지 않고, 어둠의 그림자도 머물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1절부터 18절까지의 본문은 단순한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따뜻한 부활의 장면입니다.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한 여인, 마리아에게 주님께서 이름을 부르심으로 부활의 빛을 비추신 그 순간, 우리는 고난과 죽음 너머에 계신 주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고, 그 사랑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는 부활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덤 앞에서 흐느끼는 사랑(요 20:11-13)

본문은 마리아가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요 20:11). 다른 제자들은 이미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울고 있는 그녀는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흰 옷 입은 두 천사를 봅니다. 그들은 묻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요 20:13).

마리아의 대답은 간단하지만 깊은 슬픔이 묻어납니다. “사람들이 내 주를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 20:13). 그녀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이의 시신이라도 지키고 싶은 그 마음뿐이었습니다. 죽음조차 주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사랑, 바로 그것이 마리아를 무덤 앞에 붙들어두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고난주간을 지나온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붙들며 눈물 흘리는 이들에게, 주님은 부활의 첫 증언자로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부활은 이처럼 울고 있는 자, 사랑으로 기다리는 자에게 먼저 찾아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부활의 얼굴(요 20:14-15)

마리아는 무덤을 들여다본 후 돌아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합니다(요 20:14). 주님은 그녀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요 20:15).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향해 마주 서 있으면서도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고통과 상실의 안경으로 가려져 있을 때, 부활의 빛조차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말합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를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요 20:15).

마리아는 여전히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시신을 찾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살아 계셨고, 바로 그녀 앞에 계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깊은 묵상이 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지만, 우리의 믿음이 아직 부활의 눈을 뜨지 못했을 때, 우리는 여전히 죽음을 찾고 헤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부르심 속에 깨어나는 믿음(요 20:16)

이제 주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야”(요 20:16). 단 한 마디. 그녀를 향한 친밀한 음성, 과거와 현재, 고난과 회복을 잇는 단 하나의 이름. 이 음성이 들리는 순간, 마리아는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라보니!” 이는 히브리 말로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실체는 이처럼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전 인류의 구세주'이시지만, 동시에 '나의 주'이십니다. 부활은 거대한 신학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먼저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고난 가운데 묻혀 있던 마음, 두려움에 갇힌 영혼을 향해, 친히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명의 시작(요 20:17-18)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

주님은 마리아를 멈추게 하십니다. 이제는 그 사랑을 붙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나누러 가야 할 때입니다. 부활은 관계의 회복만이 아니라, 사명의 시작입니다. 마리아는 복음을 받은 첫 사람이 되었고, 곧장 달려가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 20:18).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부활의 메시지를 봅니다. 부활은 단지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만난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눈물만 흘리는 자가 아니라, 빛을 들고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며, 동시에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명입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주님은 다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무덤 앞에 앉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난의 그림자에 눌려, 살아 계신 주님을 찾기보다, 잃어버린 시신을 찾듯 신앙을 애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마리아야, 내 아들아, 내 딸아." 그 음성이 들리는 순간, 무덤은 더 이상 사망의 장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만남의 장소가 되고, 사명의 출발점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그 한 마디, 주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아침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이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각자의 이름을 알고 계시며,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도 그 음성에 응답하며 일어납시다. 그리고 외칩시다. "내가 주를 보았다." 그 고백이 여러분의 삶을 다시 살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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