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설교, 누가복음 19:28-44 눈물로 열어주신 성의 문
눈물로 열어주신 성의 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리는 이 날은, 종려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던 날이고, 호산나의 외침이 공기를 울리던 날이며,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문을 들어가시던 날입니다. 그러나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그 장엄한 순간에 주님의 눈에 고인 눈물 한 방울을 조명합니다. 그분은 환호와 열광 한가운데서도, 도시를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종려의 그림자 아래, 예언의 무게와 심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28절부터 44절까지의 본문은 단순한 입성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왕이면서도 눈물을 흘리신 분, 환영받으면서도 거절당하신 분, 외침 속에 고요히 묻힌 심장을 가진 분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종려주일의 의미를 한층 더 깊이 있게 묵상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다시 바라보게 되길 바랍니다.
나귀를 찾는 순종의 여정 (눅 19:28-35)
예수님께서 감람산 근처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셨을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매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메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눅 19:30)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타실 나귀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타보지 않은, 거룩한 용도의 짐승. 마치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흠 없는 짐승을 드리는 것처럼, 예수님께 바쳐질 나귀도 특별히 구별된 존재였습니다.
이 나귀는 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속사의 매개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 짐승을 타고 이루어집니다. 이 장면은 스가랴 9장 9절의 성취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겸손히, 조용히, 그러나 왕답게 오시는 그분은 자신의 길을 미리 준비하십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순종이 눈에 띕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를 풀어 끌고 오고,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고, 주님을 태웁니다(눅 19:35). 그들의 행동은 예언의 길을 잇는 연결고리였습니다. 순종은 작은 행위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큰 역사 안에 조율된 음표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순종할 수 있다면, 그분의 구속사에 동참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겉옷 위를 지나가신 발자국 (눅 19:36-38)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제자들이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외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눅 19:38) 이 장면은 마치 왕의 개선 행진 같지만, 그 안에는 복잡한 감정과 이해가 얽혀 있습니다.
백성들은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의 겉옷은 순종이라기보다 기대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고통이 끝나겠구나.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겠구나." 그러나 주님은 세상의 방식으로 왕이 되러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겉옷 위를 지나가신 주님의 발자국은, 우리 기대 위를 조용히 무너뜨리며 걸어가신 흔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맞이하며 무슨 옷을 펴드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기대입니까, 아니면 온전한 예배입니까? 우리의 환호는 축제의 열기입니까, 아니면 구원의 감격입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 마음의 성을 향해 걸어오십니다. 그 길에 우리가 어떤 태도로 서 있는지, 점검할 때입니다.
침묵을 명하시는 주님의 말씀 (눅 19:39-40)
그때 바리새인 중 어떤 이들이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눅 19:39) 그들은 이 찬양이 과도하다고 여겼고, 위협적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
이 대답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의 질서 속에서 구속의 찬양이 얼마나 필연적인지를 말해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는 그 순간, 만물은 침묵할 수 없습니다. 창조된 피조물의 존재 자체가 구속자를 향한 찬양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외치지 않아도, 돌들이 외칠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입성은 우주적 사건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내가 침묵하고 있는 그 자리에, 세상이 찬양하고 있다면, 돌보다 못한 믿음 아닌가요? 우리가 오늘도 침묵한다면, 우리가 누군지를 잊고 살아간다면, 창조된 세상이 대신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눈물로 예언하신 평화의 길 (눅 19:41-44)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십니다. 이 눈물은 단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예언자의 눈물이며, 구속자의 탄식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는 숨겨졌도다"(눅 19:42)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신 예루살렘은 평화의 길을 놓쳐버린 도시였습니다. 자기 눈앞에 서 있는 참된 평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거절하는 도시. 그리고 예수님은 이 도시가 장차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십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을 말씀하십니다(눅 19:44).
이 눈물은 사랑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돌이키라 외치던 심정이, 이제 예수님의 눈물로 나타납니다. 왕이 오셨으나, 성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구원이 가까이 왔으나, 도시는 눈을 감았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우리의 가정은, 우리의 마음은 어떤 모습입니까? 주님이 지금 이 자리를 바라보신다면, 미소 지으실까요, 아니면 눈물 흘리실까요?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분의 뜻은 외면한 채, 자신의 평안만을 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가 함께 묵상해야 할 질문입니다.
마무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려주일은 단지 입성의 환영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왕이신 예수님께서 겸손과 눈물로 우리를 향해 걸어오신 구속의 행진입니다. 그 길은 나귀 위에서 시작되어, 겉옷 위를 지나고, 찬양 속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결국 십자가를 향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걸으시면서도,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환영보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고, 외침보다 깊은 것은 회개입니다. 오늘 우리의 종려가지는 어떤 의미입니까? 오늘 우리의 호산나는 어떤 방향입니까?
주님은 지금도 우리 인생의 성문 앞에 서 계십니다. 눈물로, 사랑으로, 그리고 거룩한 침묵으로 서 계십니다. 우리도 이제 그 앞에서 겉옷을 벗고, 마음을 펴드리며 이렇게 고백합시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내 삶의 왕이 되어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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