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려주일 설교, 스가랴 9:9 겸손의 왕 예언의 성취

케리그마 2025. 4. 7.
반응형

겸손의 왕, 예언을 넘어 성취로 오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던 그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자주 떠올리며 찬양하고, 감격에 젖지만, 그 깊은 의미를 가슴으로 품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의 한 구절,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붙잡고자 합니다. 이 한 절이 종려주일의 그림자를 비추며, 장차 오실 메시야의 얼굴을 그려줍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시간이 지나 마침내, 예루살렘 성문 앞에 실재가 되어 다가옵니다.

스가랴 9장 9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이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는 두 가지의 거대한 파도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예언의 물결, 또 하나는 성취의 물결입니다. 이 두 파도가 만나 충돌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가 흘러넘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드러납니다. 오늘 그 파도 소리를 함께 들어보시겠습니까?

왕이시되 나귀를 타신 분 (슥 9:9)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성전은 아직 재건되지 않았고, 백성의 마음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은 놀라운 반전이었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이 말씀은 마치 광야에 들리는 봄비의 소리 같습니다. 절망 속에 있던 이스라엘에게, 하늘에서 흘러나온 소망의 선율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입니다. 왕이라면 말이나 병거를 타야 할 터인데, 왜 하필 나귀입니까? 그것도 어린 나귀 새끼입니까? 이것은 왕권의 모순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세상의 위계와 반대되는 길을 걷습니다. 강함이 아니라 낮아짐으로, 전쟁이 아니라 평화로 다가옵니다. 나귀는 평화의 동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상징을 몸소 입으신 겁니다.

이 말씀은 단지 감성적인 장면을 그려내는 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선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고귀함을 권력으로 드러내지 않고, 겸손함으로 나타내십니다. 그는 마치 잿빛 하늘 아래 핀 들꽃처럼,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향기로 존재합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린 왕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거룩하게 오십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예언에서 성취로 흐른다 (마 21:4-5)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마태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마 21:4) 그리고는 스가랴 9장 9절을 인용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닙니다. 복음서 기자는 명확히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의 성취자이시다. 그는 역사 속을 거슬러 오신 분이시며, 그 발걸음은 창세 전부터 예비된 구속의 궤적을 따라 걷고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계가 "성취"라는 시간으로 맞춰지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은 하나의 조각상이 아니라, 생생한 살아 있는 언약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사의 강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이루셨습니다. 이 흐름 안에 우리는 섭리의 손길을 봅니다. 나귀 새끼 하나조차도 계획 속에 있었으며, 제자들의 발걸음도, 무리의 환호성도, 종려나무 가지도 모두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은 왕의 왕관이 되었다 (마 21:6-9)

성도 여러분, 세상의 왕은 무엇으로 왕관을 삼습니까? 금과 보석, 권력과 무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관은 겸손이었습니다. 나귀를 타시고, 사람들의 겉옷 위를 지나시며, 무리의 외침 속에 조용히 나아가십니다. 그분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시며, 자신을 십자가로 내어주실 준비를 마친 왕이십니다.

사람들은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 21:9) 이것은 단순한 환호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예언입니다. 그들의 입술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구속의 왕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 외침은 며칠 뒤,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는 외침으로 바뀝니다. 겸손한 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대할 때, 단지 한 주간의 절기로 종려주일을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과연 어떤 왕을 기다리고 있었는가? 나의 기대는 예수님의 성품과 일치하는가? 혹시 나도, 나귀 타신 예수님을 보고 실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루살렘을 향한 침묵의 행진 (마 21:10-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했습니다(마 21:10). '소동하다'는 이 단어는 지진이 날 때 쓰이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의 발걸음이 사람의 마음과 도시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행렬이었지만, 그 안에는 세상의 질서를 전복하는 강력한 충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들립니다. "이는 누구냐?"(마 21:10) 이 질문은 단지 군중의 물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예배 가운데 드려야 할 신앙의 질문입니다. 이는 누구입니까? 나의 삶을 흔들어 놓는 이 분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이는 나의 구주시오, 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그는 함성을 원치 않으셨고, 군중의 지지를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십자가. 그 나무는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환호 소리 너머에, 이미 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겸손의 왕관을 쓰고, 고난의 길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마무리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스가랴 9장 9절을 통해 시작된 예언의 말씀이, 마태복음 21장에서 생생하게 성취되는 장면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성취의 자리에,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겸손하셨고, 그는 평화를 주셨으며, 그는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맞이한다면, 우리는 종려나무 가지보다 더 소중한 것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계획과 자존심과 무기를 내려놓고, 주님 앞에 마음의 겉옷을 펴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해야 합니다. "보라, 내 왕이 내게 임하신다.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도다."

이 겸손의 왕은 오늘도 우리의 성문 앞에 서 계십니다. 열어드리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아멘.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