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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설교, 요한복음 12:12-19 열망과 오해 사이, 나귀를 타신 주님

케리그마 2025.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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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망과 오해 사이, 나귀를 타신 주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려주일 아침입니다. 우리가 매년 이 절기를 맞이할 때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떠올리며 환호와 감격으로 예배의 문을 엽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주님을 향한 무리들의 열광, 종려나무 가지와 호산나의 외침,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오해와 착각의 그림자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2장 12절에서 19절까지의 본문은 단지 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 전체가 응축된 압축 파일과 같습니다. 그 안에는 예언의 성취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구속사적 전환점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날, 역사의 무게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움직였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향한 우리 자신의 시선을 점검하고, 그분의 왕 되심을 올바로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열광의 이면에 흐르는 긴장 (요 12:12-13)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2-13)

무리는 환호하고 있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승리와 구원을 상징하는 나무였습니다. 마치 우리가 깃발을 흔들듯, 그들은 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메시아를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한 가지 바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정치적 해방과 민족의 회복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았지만, 그 메시야는 칼을 휘두르고 로마를 무너뜨릴 강한 지도자였습니다. 즉, 그들의 '호산나'는 영적 외침이 아니라 정치적 환호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드디어 자유를 얻는구나!"라는 열망이 그들의 외침에 스며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되묻게 합니다. 나는 주님께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내가 바라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인가? 혹시 나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으나, 그분이 누구신지를 오해한 채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나귀 위에 앉으신 왕의 상징 (요 12:14-15)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요 12:14-15)

이 짧은 구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행동을 묘사하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깊은 상징이 녹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나귀를 타셨습니다. 말이 아니라 나귀, 장식된 병거가 아니라 짐을 나르던 짐승의 새끼입니다. 이는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성취하는 행위였습니다. "겸손하여 나귀를 타신 왕이 오신다"는 그 예언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선택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대함과 위세로 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약함처럼 보이는 겸손, 섬김, 비폭력의 옷을 입고 다가옵니다. 나귀는 전쟁이 아닌 평화의 상징이며, 무력의 상징이 아닌 사랑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말없이 나귀를 타시고, 우리의 눈높이보다 더 낮은 시선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십니다.

이 나귀는 단지 운송 수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속의 문턱 위에 놓인 조용한 제단입니다. 예수님은 그 나귀를 타고 성전으로, 그리고 곧 십자가로 향하십니다. 나귀는 메시아의 왕관을 머리에 이고 가는 경건한 조력자입니다. 겸손은 그 왕의 제복이 되었고, 십자가는 그 왕좌가 되었습니다.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한 그날의 의미 (요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요 12:16)

여기서 우리는 아주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도 이 사건의 의미를 즉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도 군중의 열광 속에 있었고,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가면서도 마음은 어지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후, 그리고 성령께서 임하신 후에야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아, 그때 그 나귀, 그 종려나무 가지, 그 호산나의 외침이 단순한 축제가 아니었구나.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신앙은 때로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깊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은 그 순간에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주님의 발자취를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날, 나귀 위에 앉으셨던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셨는지, 우리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두 가지 무리, 한 가지 질문 (요 12:17-19)

"예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요 12:17-19)

마지막 부분에서 두 무리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환영하고 따라나선 무리입니다. 그들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목격했고, 그 능력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무리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이 그를 따른다"는 그들의 탄식은, 사실상 하나님의 구원이 퍼지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두 무리 사이에 서 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기억하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무리인가, 아니면 자신의 질서와 체계가 무너질까봐 두려워하는 바리새인들인가? 우리 삶의 태도는 어떤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종려가지를 흔드는 무리이되,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자들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문이 열리는 상징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마음의 예루살렘을 향해 오십니다. 그리고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어떤 왕으로 맞이하겠느냐?"

마무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려주일은 찬양과 환호의 날인 동시에, 우리 믿음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날입니다. 우리가 흔드는 종려나무 가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그저 종교적 행위입니까, 아니면 겸손한 왕을 향한 깊은 경배입니까?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고, 조용히 그러나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그분의 눈에는 십자가가 있었고, 그분의 마음에는 우리 모두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그분은 겸손의 옷을 입고 우리 삶의 골목으로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외쳐야 할 진짜 호산나는, "주님, 저를 정치적으로, 상황적으로 구원하소서"가 아니라, "주님, 제 안의 죄를, 교만을, 이기심을 구원하소서"입니다.

나귀를 타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겉옷을 벗어 그분의 길 위에 펴드릴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 마음의 성문이 열려 그분을 영접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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