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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설교, 요한복음 20:11-18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부활의 아침

케리그마 2025.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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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부르시는 부활의 아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을 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 복음의 핵심, 구원의 완성이 바로 이 부활의 사건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 부활의 아침에 일어난 한 장면에 집중해 보려 합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만남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1절부터 18절까지의 본문은, 단순한 회상의 기록이 아니라, 부활이 어떻게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언입니다.

마리아는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했던 주님의 시신마저 사라져버린 절망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울음의 자리에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부활이 단지 시간 속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 삶 속에 다가오는 부르심의 은혜라는 사실을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무덤 앞의 눈물 (요 20:11-13)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두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요 20:11-13)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 어스름 속,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녀의 손엔 향품이 있었고, 가슴엔 슬픔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무게는 종종 눈물이 됩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믿음과 절망 사이를 걷게 합니다. 그녀는 부활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기도 전입니다. 그녀에게 무덤은 ‘끝’이었고, 죽음은 ‘패배’였으며, 사라진 주님의 몸은 또 하나의 상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절망의 자리, 무덤 앞에, 하나님은 은혜의 전환점을 두십니다. 천사들이 나타납니다. 머리와 발에 하나씩 앉은 두 천사. 이 장면은 마치 구약의 언약궤를 연상시킵니다. 속죄소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임재하셨던 하나님의 영광처럼, 이제 그 언약의 성취가 된 예수님의 부활 자리를 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슬픔의 무덤이 아니라, 구원의 자리로 전환된 새로운 시작의 성소였습니다.

보되 알아보지 못하다 (요 20:14-15)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요 20:14-15)

마리아는 주님을 보았지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눈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까요? 절망이 믿음을 가로막고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부활의 몸이 너무도 새로워 그녀의 익숙한 인식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요?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영적 진리를 발견합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은 때로 우리의 눈앞에 계셔도,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깊은 밤, 상실의 긴 골짜기, 그 안에서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분을 정원지기로 오해합니다. 마리아처럼, 부활의 능력을 눈앞에 두고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의 언어로 상황을 해석하려 합니다.

"누구를 찾느냐?" 주님의 이 질문은 단순한 물음이 아니라, 마리아의 믿음을 깨우는 울림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새벽에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잃어버린 희망입니까, 과거의 주님입니까, 아니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구속자입니까?

이름을 부르시는 은혜 (요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라보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요 20:16)

여기서 모든 것이 바뀝니다. 주님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이 한 마디가 무너진 그녀의 세계를 다시 일으킵니다.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들려온 생명의 음성.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논증’이 아니라 ‘호명’입니다. 부활은 역사적 증거이기 이전에, 인격적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각 사람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막연하게 “너희들아” 하지 않으십니다. “마리아야.” 그 음성에는 친밀함이 있고, 회복이 있으며, 정체성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 부르심 앞에서 비로소 주님을 알아보고, “라보니!”라고 고백합니다. 단순한 선생이 아닙니다. 자기 영혼의 주인이며, 부활의 주이신 분을 향한 절박한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고통 속에서, 외로움 속에서, 실패의 길목에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다시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붙들고 싶지만 보내시는 주님 (요 20:17-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요 20:17)

마리아는 주님의 발을 붙들었을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을,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붙들지 말라." 이는 차갑게 거절하신 말씀이 아니라, 더 깊은 만남을 위한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승천하실 것이며, 단지 물리적인 만남을 넘어, 성령 안에서 더 깊은 연합의 길로 인도하시려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붙드는 순간, 주님은 그녀를 사명자로 보내십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라." 이는 단지 정보를 전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의 최초 증인으로, 부활의 첫 사도로 세우신 것입니다.

여인이었던 마리아가, 당시 문화 속에서 법적 증언도 인정받지 못하던 여인이, 가장 위대한 소식을 들고 가는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반전입니다. 세상이 무시한 자를 통해 생명이 증언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그 사명의 자리에 함께 서 있습니다.

마무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부활의 아침, 우리는 빈 무덤 앞에서 울던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부활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부활은 눈물의 자리에서 시작되었고, 주님의 음성을 통해 인격적으로 선포되었으며, 사명의 자리로 이어졌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마리아야", "베드로야", "요한아", 그리고 여러분 각자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그 음성이 오늘 여러분 안에 생명의 울림으로 퍼지기를 바랍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은 무덤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의 대답이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부활이시고, 나의 생명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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