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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5:25~38 묵상, 찢어진 휘장 열려진 길

케리그마 2025.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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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에서 찢어진 휘장, 열려진 길

마가복음 15장 25절부터 38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시며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핵심이자 중심인 십자가 사건은, 이 본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구속사의 완성이며,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강렬하게 표현된 자리입니다. 이 장면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자리이자,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허물어지는 시간입니다.

제 삼시에 못박히시다: 하나님의 때에 이뤄지는 구속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25절). 유대인의 시간 개념으로 제삼시는 오전 아홉 시입니다. 해가 완전히 떠올라 사람들의 활동이 시작되는 이른 아침, 예수님의 십자가 형이 집행됩니다. 이는 구약에서 제물로 바치는 번제가 하루에 두 번 드려지는데, 그 중 하나가 제삼시에 드려졌다는 점과 맞물리며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은 단지 사형수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하신 시간에, 정하신 방식으로 자신을 드리는 번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장면은 레위기의 희생제도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예언을 그대로 실현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찔리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며, 그가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사 53:5). 이는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 완전하게 실행된 구속의 순종입니다.

그 위에 붙은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 적혀 있었습니다(26절). 이는 로마식 처형 관례였지만, 이 말은 진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조롱의 의미로 붙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조롱 속에서도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유대 민족의 왕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십자가 위에 계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실패가 아니라, 왕 되심이 드러나는 영광의 자리였습니다.

조롱받는 메시아: 고통 속에서도 신실하신 주

예수님의 양편에는 강도 둘이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27절). 이는 이사야 53장 12절의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도다”라는 예언을 성취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낮고 부끄러운 자들과 함께 죽임당하신 것은, 그의 고난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음을 더욱 확증합니다.

예수님은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지나가던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말합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9-30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비슷하게 말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31절). 이 조롱은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왜곡한 말이며, 믿음 없는 자들의 대표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진리를 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기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내려오셨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머무르신 그 선택은 곧 사랑의 절정이었고, 순종의 절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조롱을 참으셨고, 침묵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이는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 말하듯,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게이지 아니하시더니”라는 말씀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었습니다.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33절)라는 말씀은 창조 질서 자체가 무너지는 듯한, 우주적 슬픔과 진노의 표현입니다. ‘어둠’은 종종 하나님의 심판과 임재를 나타냅니다. 출애굽기의 애굽에 임한 재앙 가운데도 어둠이 있었고,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을 때에도 깊은 어둠이 임했습니다. 이 어둠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홀로 감당하고 계신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의 정점에서 부르짖으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아람어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34절)라는 뜻입니다. 시편 22편 1절의 인용이기도 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절규이며, 동시에 성경의 성취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인을 대신한 형벌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이 숨겨지는 고통을 겪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의 교제가 일시적으로 끊어지는, 우리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이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다: 닫힌 길에서 열린 길로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37-38절). 이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짓던 장막으로, 일반 백성은 물론 제사장조차도 1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만 대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를 가리던 휘장이었습니다.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0절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의 찢기신 몸이 곧 찢어진 휘장이었고, 그로 인해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점은,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셨다는 상징이며, 인간의 시도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인간은 더 이상 제사제도를 통해, 혹은 중보자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담대히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은 고통의 끝이었지만, 동시에 새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율법의 시대가 마감되고, 은혜의 시대가 열린 시간.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죽음을 통해 생명이 열리고, 그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휘장 너머로 들어가는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결론

마가복음 15장 25절부터 38절은 복음의 심장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고통 속에서도 신실하셨고, 침묵 속에서도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인간의 죄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이었고, 그 어둠은 심판의 상징이었으며, 그 찢어진 휘장은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 안에 서 있습니다. 바라바가 풀려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자리에 있어야 했던 자들이었지만, 주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 어떻게 서 있습니까? 주님의 죽음을 지나치듯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휘장을 뚫고 나아간 그 길을, 여전히 막힌 듯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그 휘장 뒤로 나아가는 그 길을 따라 순종함으로 살아갈 때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눈물의 상징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승리의 깃발입니다. 그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께로 가는 참된 길 위에 서는 삶입니다.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찢어진 휘장 사이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생명의 삶] 2025년 월 묵상 본문입니다.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복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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