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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5:1~15 묵상, 심판 받는 그리스도

케리그마 2025.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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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 이가 죄인 대신 내어준 아침

마가복음 15장 1절부터 15절까지는 예수님의 재판 장면 중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단지 로마 총독의 정치적 판단을 다룬 서술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무대가 열리며,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의, 정의와 불의, 침묵과 고백이 교차하는 격렬한 신학적 진실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죄 없는 분이 어떻게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셨는지를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진행된 불의한 아침의 회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1절). 이 ‘새벽’이라는 시간은 상징적입니다.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 인간의 죄와 위선이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시간이자, 그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밤새 불법적인 재판을 통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 했지만, 유대 사회에서는 사형 집행의 권한이 로마에게 있었기에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이는 예수님을 종교법만이 아니라, 정치적 반역자로 몰아 죽이려는 의도였습니다. 예수님께 씌워진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적 죄였습니다. 이는 곧 로마에 반역하는 선동자로 몰기 위한 조작된 혐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2절) 이는 단순한 사실 확인이 아니라, 로마 권력 아래에서 정치적 위협이 되는가를 따지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 말이로다.” 이 말씀은 직설적인 긍정도, 부정도 아닌, 빌라도 스스로의 책임을 반사하는 형태의 표현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이는 su legeis로, “그것은 네가 말한 바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죄목의 진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밝히시되, 억지로 변명하거나 방어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이사야 53장의 예언,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라는 구절의 성취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을 앎이러라”(10절)라고 기록합니다. 그는 정치가로서 민심과 권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으며, 진실보다는 자신의 입지를 더 우선시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진리가 뚜렷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압박에 굴복하는 정치와 사회의 구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폭력적인 군중과 왜곡된 정의

빌라도는 유월절 명절을 맞아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관습을 따르려 합니다. 그는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를 내어주고자 하는 정치적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뜻밖의 인물을 요구합니다. “바라바를 놓아 주라”(11절).

바라바는 단순한 도둑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살인과 폭동에 관련된 흉악범으로, 진짜 반란자였습니다(7절).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리에 있던 무리는 예수를 죽이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외칩니다. 빌라도는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고 묻습니다. 그들은 더욱 소리 지릅니다.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13절)

이 장면은 인류 역사상 가장 부당한 교환이 이루어진 자리입니다. 무죄한 예수가 죄인인 바라바와 맞바꾸어지고, 정의는 여론의 광기 앞에 침묵당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삶 속에서도 여전히 이어지는 신학적 현실입니다. 바라바는 곧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 죄의 결과로 사망을 마땅히 받아야 할 자,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자유케 된 존재입니다. 우리가 바라바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백성들, 그리고 빌라도 모두의 손에 의하여 죽음으로 내몰리셨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주권이 맞물리는 역사의 순간이며, 구속의 핵심입니다.

 

침묵의 메시지, 사랑의 승리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예수님의 침묵입니다. 본문 4절과 5절에서 빌라도는 다시 물으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이 침묵은 무기력한 방관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구속의 언어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말 한마디로 로마도, 공회도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의 절대적 순종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의도적 선택입니다. 침묵은 때로 가장 강력한 증언이 됩니다. 이 침묵은 정죄가 아닌 용서를 위한 것이었고, 정복이 아닌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승리의 길이었습니다.

빌라도는 결국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니라”(15절). 그는 진실을 알면서도, 정의를 행할 용기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는 백성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구주를 팔아넘깁니다. 빌라도는 한 손에 물을 떠서 씻었지만, 그의 양심은 그 물로 깨끗해질 수 없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면서도, 다수의 목소리에 굴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편안함을 지키기 위해 복음을 희생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의 채찍과 십자가는 인간의 최악이 집약된 폭력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그 도구 위에 하나님의 사랑이 덧입혀질 때, 그 고난은 구원의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침묵과 고난은 지금도 우리를 살리는 능력이며, 세상의 어두움 가운데 빛이 되어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결론

마가복음 15장 1절부터 15절은 우리가 믿는 복음의 정수를 응축해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은 무죄하심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하시며, 죄인들의 자리에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분은 입을 다물고, 손을 내어주시며, 결국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진리를 세우셨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 각자에게 묻습니다. 바라바가 풀려나는 그 자리에 내가 있었음을 아는가? 예수님의 침묵이 나를 위한 순종이었음을 기억하는가? 세상의 여론과 세력 앞에 우리는 누구의 편에 서고 있는가?

주님은 무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만족을 드리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 길은 채찍과 고통과 침묵의 길이었지만, 그 길 끝에 생명이 있었고, 구원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걸어가야 할 길도 바로 그 길입니다. 바라바 대신 살아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진리를 붙들고, 때로는 침묵하며, 그러나 언제나 사랑으로 응답하는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 길 끝에서, 다시 만날 주님을 소망하며 말입니다.


[생명의 삶] 2025년 월 묵상 본문입니다.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복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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