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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28 - 19:48 묵상, 호산나 호산나

케리그마 2025.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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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시작된 왕의 입성 –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심장

누가복음 19장 28절부터 48절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환호와 환영으로 가득 찬 입성이지만, 그 중심에는 눈물과 심판, 그리고 주님의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누가는 이 장면들을 단지 사건의 흐름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정체성과 그분의 사명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묘사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의 민낯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준비된 낙위, 순종의 걸음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감람산 근처인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러 제자 둘을 보내어 말씀하십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라.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으니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30절). 여기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라는 표현은 제물이나 왕의 탈것으로 쓰일 준비된 것임을 상징합니다. 구약에서는 거룩한 용도로 구별된 것은 일반적인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민 19:2). 예수님은 자신이 왕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에서까지도 율법적 상징을 완전히 이루어내십니다.

이 명령에 제자들은 아무 말 없이 순종합니다. 그들은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왜 나귀를 가져와야 하는지도 다 알지 못했지만, 주님의 말씀에 “그 말씀대로 하였다”(32절)는 순종이 본문에 드러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분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할 때 주님의 계획이 이루어짐을 경험합니다.

또한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나귀 주인이 그 짐승을 내어주는 장면은 하나님의 섭리와 예비하심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은 이 장면을 간결하게 기록하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예비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필요한 것을 예비하십니다. 왕의 입성은 화려한 마차가 아니라, 가장 겸손한 나귀 새끼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곧 메시아 예수의 방식입니다.

외침과 눈물 사이 –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 언덕을 내려오시며 예루살렘을 향해 입성하십니다. 군중들은 기뻐하며 소리 높여 찬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 이 외침은 시편 118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며,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 외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바뀔 것입니다. 환호 속에 담긴 진정성 없는 기대, 자기 욕망에 기초한 신앙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꾸짖으소서”(39절). 그들은 제자들의 외침이 신성모독이라고 여겼고, 자신들의 신학적 질서를 해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40절). 하나님의 아들이 입성하시는 이 장면은 만물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며, 창조 자체가 그분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환호하는 무리들 사이에서 울기 시작하십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41절). ‘우셨다’는 이 단어는 헬라어로 “ἔκλαυσεν(eklausen)”인데, 조용한 눈물이 아니라 통곡하며 우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흘리신 눈물과는 결이 다릅니다. 그곳에서의 눈물은 동정과 사랑의 표현이었고, 이곳에서는 심판과 안타까움의 통곡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는 숨겨졌도다”(42절).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정작 참된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생각한 방식의 메시아가 아니기에 주님을 거절합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결국 로마의 침공으로 철저히 무너질 것이며, 그 심판은 역사적으로도 정확히 성취됩니다(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수님은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하였음이라”(44절)고 탄식하십니다. ‘보살핌을 받는 날’은 헬라어로 “τὸν καιρὸν τῆς ἐπισκοπῆς(skope)”인데, 이는 하나님의 방문, 곧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는 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계시지만, 사람이 마음을 닫으면 그 은혜의 때는 지나가게 됩니다.

성전을 회복하시는 분 – 메시아의 권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성전으로 들어가 그것을 정결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45절). 여기서 ‘내쫓다’는 헬라어 “ἐκβάλλω(ekballō)”는 강제적으로 쫓아낸다는 뜻으로, 매우 강한 행위를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예의 바르게 항의하신 것이 아니라, 신적 권위로 그들의 불경건함을 단호히 단죄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며, 기도의 집이 되어야 했지만,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것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46절)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56장 7절과 예레미야 7장 11절을 결합한 것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완전히 왜곡시킨 유대인들의 위선을 꾸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매일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47절). 그들은 종교적 지도자였지만, 오히려 진리를 거부하고 빛을 미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성전을 더럽힌 장본인들이었지만, 예수님의 권위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때를 엿보며 기다립니다.

“백성은 다 그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니라”(48절). 이 구절은 단순한 배경 설명이 아니라, 복음의 두 갈래 반응을 드러냅니다. 한쪽은 말씀을 듣고 감동하며 변화되기를 사모하는 무리들이었고, 다른 쪽은 그 말씀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복음 앞에서는 중립이 없습니다.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것, 오직 두 길뿐입니다.

결론

누가복음 19장 28절부터 48절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여정이자, 그분의 메시아 사명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본문입니다. 겉으로는 환호와 환영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환영은 진실한 믿음이 아닌, 자기 기대에 근거한 얕은 열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환호는 곧 증오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걸어가십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성을 바라보시며 우시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과정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랐지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메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그러나 진정한 평화를 거절한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그분을 왕으로 모시며, 그분의 눈물에 공감하고, 그분의 성전을 내 삶 가운데 온전히 회복시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복음은 단지 듣고 감동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눈물, 주님의 분노, 주님의 가르침이 내 삶을 꿰뚫을 때, 우리는 진정한 회복과 순종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성전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성전은 단지 건물이 아닌, 성령이 거하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기도의 집이어야 하며, 말씀을 사모하는 자리여야 합니다. 환호와 열광을 넘어서, 눈물과 순종으로 주님의 길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매일성경 4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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