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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9 - 20:40 묵상, 시험하는 질문들

케리그마 2025.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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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 이기시는 주님의 권위 – 함정 속에서 드러난 진리의 빛

누가복음 20장 19절부터 40절은 예수님께 도전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의 집요한 함정과, 그 안에서 드러나는 주님의 탁월한 지혜와 진리를 보여줍니다. 사람의 꾀로 진리를 무너뜨릴 수 없음을, 그리고 부활의 소망이 인간 논리 너머에 있음을 선포하는 본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권위 앞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진리에 서 있는 자의 삶이 무엇인지 다시금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위선을 파헤치시는 질문의 주님

본문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19절)라는 서술로 시작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하신 악한 농부의 비유는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서 밀려날 운명을 직설적으로 고발하는 비유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였고, 당황함과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지지와 여론이 두려워 그 즉시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대신 교묘한 질문을 통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계략을 세웁니다.

20절은 그들의 악한 꾀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말의 허물을 잡게 하니라.” ‘정탐’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ἐγκαθέτους(engkathetous)”로, 문자적으로는 ‘몰래 심어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정식 종교인이나 공적인 직함이 없는 자들, 즉 유대 지도자들이 심어 놓은 첩자들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의 외모를 하고서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연합이라는 모순된 연합체로 구성되어 예수님 앞에 나아갑니다(참고: 마태복음 병행 본문).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21절) 겉으로는 극존칭을 사용하며 예수님을 칭찬하지만, 속에는 예수님의 말실수를 유도하려는 간교한 계산이 숨어 있습니다. 그들은 가장 위험한 질문, 곧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22절). 이 질문은 정치적으로든 신앙적으로든 예수님을 어떤 형태로든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이중의 함정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 반역자로 몰려 백성의 지지를 잃게 될 것이고,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 당국에 반역자로 넘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간계를 간파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24절) 그들이 “카이사르의 것이니이다”라고 하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25절). 이 말씀은 단순한 정치적 회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두 중심을 정확히 분리하면서도 통합하는 위대한 원리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질서 안에서의 책임”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충성”을 절묘하게 구분하십니다. 로마의 통치 아래 있는 유대인들은 데나리온을 사용하며 그 질서의 유익도 누리고 있었기에 마땅히 세금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존재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 시간, 재능, 물질—all these are God’s.

그 말씀에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26절). 진리 앞에 인간의 꾀는 무기력합니다. 주님의 지혜는 모든 함정 위에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모략으로도 끌어내릴 수 없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동일한 사실입니다. 진리를 비틀고 공격하려는 이 시대의 수많은 시도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으며 빛으로 빛납니다.

부활을 조롱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던지신 진리

26절까지의 상황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중심의 도전이었다면, 27절부터는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부활이 없다 하는 자’라고 누가는 분명히 밝힙니다(27절). 사두개인들은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며, 영혼의 존재, 천사의 활동, 부활 등을 부정하던 엘리트 계층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방식으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28절). 이는 신명기 25장에 근거한 계대결혼 제도입니다. 그들은 가상의 이야기를 꺼내어 일곱 형제가 모두 차례로 죽고, 한 여인과 결혼한 뒤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했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하며, “부활 때에 그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되겠나이까?”(33절)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실제의 진리 탐구보다는 부활 신앙을 조롱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 이후의 세계를 이 땅의 연장선으로만 이해하고 있었으며, 부활의 실재를 허구적, 비논리적인 신념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뒤집으십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34-35절). 예수님은 부활 이후의 삶이 단순한 육체의 연장이 아닌, 전혀 새로운 차원의 존재임을 선포하십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는 거룩한 상태이며, ‘천사들과 같고 하나님의 자녀’(36절)라는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의 성경적 근거를 설명하시며 모세의 떨기나무 이야기로 연결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38절). 여기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인정하는 모세오경 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인용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과 관계하고 계시며,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부활의 논리로 연결하십니다.

이 장면은 부활 신앙이 단지 미래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현재적인 관계 속에 이미 시작된 실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자의 하나님이시며, 그분과의 관계가 죽음으로 끊기지 않음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참된 부활 신앙입니다.

침묵하게 되는 자들 – 진리 앞에서의 반응

예수님의 답변을 들은 어떤 서기관은 감탄합니다.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39절). 그리고 “그들은 아무 것도 더 물을 수 없었고 감히 그에게 대답하지 못하였더라”(40절). 진리 앞에서 인간의 궤변은 끝이 납니다. 예수님은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토론자가 아니셨습니다. 그는 진리 자체이셨고, 그 진리가 현장에서 빛을 발하며 사람들의 입을 막고, 양심을 건드리고, 마음을 흔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말로 이기신 것이 아니라, 본질을 드러내셨고, 그 본질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권위와 부활의 실재였습니다. 인간은 자꾸만 하나님을 조작하려 들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하나님을 제한하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진리 앞에서 사람들은 결국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회피하거나, 받아들이거나. 중립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감탄하게 하되, 동시에 회개하게 하며,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결론

누가복음 20장 19절부터 40절까지의 본문은 인간의 궤계 속에서도 진리의 권위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깊이 새겨 줍니다. 예수님은 함정과 조롱, 도전 앞에서 침착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단순한 반박이 아니라, 영원을 가리키는 복음의 선언이었습니다.

세금을 둘러싼 질문에서도, 부활에 대한 조롱 속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과 미래를 선명히 밝혀주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의 의무와 저 하늘의 소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권위 앞에 어떤 자세로 서 있습니까? 단지 껍데기 신앙을 가진 바리새인처럼, 진리를 조롱하고 왜곡하려는 사두개인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진리 앞에서 침묵하고, 그 말씀 앞에 무릎 꿇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진리는 언제나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결국 결정해야 합니다. 그분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부활의 소망,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말씀의 권위 위에 우리의 삶을 다시 세우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진리의 빛 앞에 서서, 겸손히 순종하며, 오늘도 주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복된 인생 되시길 축복합니다.


매일성경 4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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