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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41 - 21:4 묵상, 다윗의 주, 과부의 헌금

케리그마 2025.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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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 다윗의 주, 과부의 헌금

누가복음 20장 41절부터 21장 4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교만을 책망하시고, 참된 경건과 헌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메시아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심으로 서기관들의 이해 부족을 드러내시고, 이어서 외식적인 종교인의 삶을 경고하시며, 마지막으로 한 과부의 드림을 통해 진정한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십니다. 이 짧은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보시는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그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떤 가치로 살아야 하는지가 담겨 있습니다.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다윗의 자손인가, 다윗의 주인가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41절).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무엘하 7장에 나오는 다윗 언약에 근거한 것이며, 구약 전체를 통해 확증된 내용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기대가 단지 혈통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그 제한된 시각을 흔드십니다.

예수님은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시며 질문을 이어가십니다.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42-43절). 이 구절은 다윗이 메시아를 가리켜 ‘내 주’라고 부른 부분입니다. 헬라어로 ‘주’는 “κύριος(kurios)”로, 이는 하나님께만 사용되는 경칭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편을 인용함으로써, 메시아가 단지 다윗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다윗 자신이 경배하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44절). 이 질문은 단지 성경 지식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적인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며,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 오셨지만, 본질로는 다윗조차 경배해야 할 주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습니까? 단지 필요할 때 도와주시는 능력의 주님, 나의 삶을 편하게 해주는 구세주로만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기대를 초월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단순한 종교적 이해를 넘어서야 합니다.

경건의 외식과 내면의 부패

예수님은 곧 이어서 서기관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46절) 자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경건한 체하며, 실상은 자기 과시와 권위에 집착했던 모습을 꼬집으신 것입니다.

이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47절)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외식’이란 단어는 헬라어 “ὑπόκρισις(hypokrisis)”로, 연극에서 배우가 가면을 쓰고 다른 인물처럼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약자들을 착취하고, 기도를 자기 과시의 도구로 삼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에게 ‘더 엄한 심판을 받으리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긴 기도에 감탄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 기도의 동기를 살피십니다. 사람은 화려한 직책에 주목하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에 앉은 자의 태도를 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외식적인 종교생활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기 위한 종교적 포장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와 신앙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과연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도, 헌신도, 섬김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진실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전 안에서, 교회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헌금함 앞에서 드러난 참된 믿음

이어서 예수님은 헌금함을 바라보십니다. 그곳에는 많은 부자들이 헌금을 넣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이 장면을 짧게 기록하지만, 매우 강렬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는 모습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3절). 여기서 ‘참으로’라는 말은 헬라어 “ἀληθῶς(alēthōs)”로, 진리를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이 과부의 드림이 단순한 감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진짜 많은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두 렙돈은 동전 중에서도 가장 적은 액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생활비 전부’였음을 아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액수가 아니라, 드림의 본질입니다. 부자들은 그들 소유 중 풍족한 것에서 일부를 드렸지만, 과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과부의 드림을 통해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얼마만큼 드렸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드렸는지를 보십니다. ‘전부를 드렸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삶 전체를 의탁했다는 고백입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이 장면은 앞서 서기관들의 외식과 강하게 대조됩니다. 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었고, 이 과부는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모습을 함께 배치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신앙과 거절하시는 위선을 선명히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시간, 재정, 에너지, 마음—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고 있습니까? 혹은 여유에서만 드리고, 남는 것으로만 헌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결론

누가복음 20장 41절부터 21장 4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의 마지막 장면이자, 참된 신앙의 정수가 응축된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의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신이 단지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서기관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책망하시고, 가난한 과부의 작은 드림 안에 담긴 위대한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배와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습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누구로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진실한 것입니까? 우리는 여유 속에서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전부를 드리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성전 한편에서 조용히 두 렙돈을 넣는 한 여인을 주목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시선은 항상 사람의 중심에 머무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속 깊은 동기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드렸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 그 작은 믿음의 걸음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갑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경건보다, 중심의 고백이 더 크고 깊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며, 마음을 다해, 생명을 다해, 진실하게 주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매일성경 4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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