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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24 - 22:38 묵상, 검을 준비하라

케리그마 2025.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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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크기는 십자가로 드러납니다 – 제자도와 고난의 준비

누가복음 22장 24절부터 38절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직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제 곧 고난의 길을 걸으실 것이고, 제자들 역시 그 길을 따라야 할 운명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크냐는 논쟁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이 상황 속에서 참된 위대함이 무엇인지,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가르치십니다. 제자도란 곧 섬김이며, 시험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인내이며, 주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준비된 삶임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배웁니다.

제자들의 논쟁, 주님의 섬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직후, 제자들 사이에는 누가 더 크냐는 다툼이 일어납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24절). 이 장면은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조금 전까지 예수님께서는 “이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라 하시며, 자기 희생과 섬김의 절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영광과 자리, 서열과 위치를 따지고 있습니다.

‘다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φιλονεικία(philoneikia)”로, 단순한 말다툼을 넘어서 강한 경쟁심과 분쟁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지금도 예수님이 세우실 ‘나라’에서 자신들이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기보다 세상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고난의 식탁 앞에서조차 권력의 서열을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25-26절). 주님은 세상과 다른 나라, 곧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르치십니다. 세상의 리더십은 지배하고 다스리는 방식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예수님의 나라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선 자가 아니라, 그 아래서 모든 자를 받쳐주는 자가 참된 리더가 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의 모습을 예로 드십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27절).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헬라어 “διακονῶ(diakonō)”로, ‘디아코노스’, 즉 종이 식탁에서 시중드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제자들 사이에 섬기는 자로 오셨다는 이 선언은 복음의 정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권위의 행사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어주는 섬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 중에 나와 함께 한 너희’(2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라를 맡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29절). 제자들은 비록 미숙하고 때로는 오해와 다툼 속에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이 결국은 자신과 함께 고난에 참여한 자로 보십니다. 이것은 단지 그들의 충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실하심에서 비롯된 평가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보다, 그분의 은혜를 더 크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시몬을 위한 중보기도 – 시험을 이기게 하는 은혜

예수님은 이 다툼 속에서 특별히 베드로를 지목하여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31절). 여기서 ‘밀 까부르듯 하다’는 표현은 곡식을 체에 걸러내듯 철저히 시험하고 흔들겠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은 제자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으며, 베드로는 그 중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미 그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32절). 여기서 ‘떨어지다’는 단어는 헬라어 “ἐκλίπῃ(eklipē)”로, ‘사라지다’, ‘소멸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시험에 넘어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중보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실패를 모르시는 분이 아니라, 실패를 넘어 다시 일어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네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2절)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곧 넘어질 것이지만, 그 실패가 끝이 아닙니다. 돌이킨 이후에 그는 오히려 형제들을 세우는 자로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과거가 아니라, 회복 이후의 사명을 보시는 은혜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순간에도 자신을 과신합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33절). 예수님은 그의 의지를 꿰뚫고 계셨습니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34절). 베드로의 자신감은 결코 그의 믿음을 지켜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신앙의 깊이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는 낮아짐에서 비롯됩니다.

검을 준비하라 – 고난의 현실과 주님의 승리

본문 마지막에서는 예수님이 이전의 파송과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전대나 주머니나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35절). 제자들은 “없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셨음을 인정하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36절)라고 하십니다.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무장을 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제 고난의 시간이 임박했고, 제자들이 영적 전쟁과 박해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검’은 자기 보호의 수단이 아니라, 그들이 이제 더 이상 세상 속에서 환영받지 못할 존재가 될 것임을 상징하는 도구입니다. 그들에게 평탄한 길이 아니라, 좁고 험한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의 배경에 한 가지 이유를 제시하십니다.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37절). 이는 이사야 53장 12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죄인 취급을 당하시며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지 과거의 예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38절)라고 반응합니다. 예수님은 “족하다”(ἱκανόν ἐστιν, hikanon estin) 하시며 그 대화를 마무리하십니다. 이는 더 이상 말로 설명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종결의 표현입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길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의 한계 속에서도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결론

누가복음 22장 24절부터 38절은 마지막 만찬의 은혜로운 순간 직후, 제자들의 미숙함과 예수님의 인내가 극적으로 대비되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크기를 다투고 있었고, 예수님은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며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과신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십자가의 현실 앞에서, 제자들에게 고난의 준비를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임금과는 다른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분은 높아지기보다 낮아지셨고, 군림하기보다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영광의 부활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크기보다 섬김을, 안정보다 고난을, 자기 확신보다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있노라.” 그 섬김의 본을 따라, 오늘 우리의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시험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회복 이후의 사명을 붙드는 신실한 제자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날이 올 때, 영광의 주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은혜의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매일성경 4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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