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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1 - 23:25 묵상, 예수와 죄인 바라바

케리그마 2025.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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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앞에 선 침묵 – 무죄하신 예수와 죄인 바라바

누가복음 23장 1절부터 25절은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결국 십자가형을 언도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이 본문은 단지 불의한 재판의 서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가 어떻게 인간의 악을 넘어서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내는 깊은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죄하셨지만 죄인 바라바 대신 십자가에 넘겨지셨고, 침묵과 진리, 불의와 정의, 고난과 구원이 교차하는 이 장면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은혜의 복음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종교적 혐의에서 정치적 조작으로 – 왜곡된 고소의 전략

공회는 새벽부터 이미 예수님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법으로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깁니다. 본문은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권하여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1–2절)라고 전합니다.

이 고발은 본질적으로 조작된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정죄했지만, 빌라도 앞에서는 그 혐의를 정치적 반역죄로 바꾸었습니다. ‘백성을 미혹한다’, ‘세금을 바치지 말라 한다’, ‘스스로 왕이라 한다’는 세 가지 죄목을 들이댄 것입니다. 이는 로마제국의 치안과 질서를 해치는 자로 보이게 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거짓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명하셨고(눅 20:25), 백성을 미혹한 것이 아니라 진리로 인도하셨습니다. 스스로 왕이라 하신 것도 세상적 정치권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인간이 진리를 억누르고 왜곡하며, 자기 정당화를 위해 거짓을 덧씌우는 방식이 얼마나 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죄인은 의인을 미혹자라 부르고, 진리를 권력의 위협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참된 왕은 이런 고소 속에서도 침묵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간의 법정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계획 앞에서 자기를 내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절)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네 말이 옳도다.” 이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상대의 질문 안에 담긴 의도를 반영하여 답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로마가 이해하는 정치적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참된 왕이셨습니다. 그분은 말과 군대로 통치하지 않으시고, 진리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고, 무죄를 선언합니다. “이 사람에게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4절). 그러나 군중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큰 소리로 압박합니다. “그가 갈릴리에서부터 이곳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5절). 그들의 주장에는 오히려 복음의 진실이 드러나 있습니다. 복음은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땅으로 확장되고 있었고, 하나님 나라는 기존의 질서를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에서 헤롯에게, 다시 빌라도에게 – 정치적 회피의 반복

군중의 말에 ‘갈릴리’라는 단어가 나오자, 빌라도는 예수님의 관할권을 피하고자 헤롯 안디바에게 그를 넘깁니다. 이는 정치적인 책임 회피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체류 중이던 헤롯은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으로, 오랫동안 예수에 대해 듣고는 있었지만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8절).

헤롯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은 그 앞에서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9절). 그가 원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기적이었고, 경외심이 아니라 호기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그가 진리 앞에 설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결국 헤롯은 예수님을 멸시하고 희롱하며 빌라도에게 다시 돌려보냅니다. “희롱하고 희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11절). 그는 예수님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고, 메시아를 광대처럼 대했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합니다. “보라 너희가 이 사람을 내게 끌어왔으나 내가 너희 앞에서 신문한 결과 너희가 고발하는 그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14절). 헤롯 역시 그를 유죄로 판단하지 않았음을 확인합니다(15절).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16절)는 결정은 정치적 타협의 결과였습니다. 죄는 없지만 군중을 달래기 위해 채찍질이라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폭도는 채찍으로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십자가’만을 원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 인물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빌라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권력과 정치적 안정을 위해 양심을 묻어둡니다. 다른 하나는 헤롯입니다. 그는 진리에 대한 경외 없이 호기심으로 예수를 대했고, 결국은 그분을 조롱하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진리를 외면한 자는 결국 그 진리를 조롱하게 됩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진리 앞에서 중립을 선택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앞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외면은 결국 부인이며, 방조는 곧 동조입니다. 우리가 예수 앞에서 입을 다물면, 세상은 거짓된 외침으로 십자가를 외칠 것입니다.

무죄하신 예수와 풀려난 죄인 – 구속의 은혜

본문의 마지막은 가장 충격적인 전환점입니다. 빌라도는 유월절 특사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에 따라 “그들이 요구하는 자를 놓아주기로 작정하고”(24절),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밀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아주고 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25절)고 기록됩니다.

여기서 ‘바라바’는 반란과 살인을 저지른 죄인입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로마 질서를 해친 자였고, 그가 받을 형벌은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바라바를 선택했고, 무죄한 예수는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당시 민중의 무지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구속의 교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죄인이 살아나고, 의인이 죽임을 당하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본질입니다.

바라바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며, 죽음의 심판 아래 놓였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심으로,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무죄하신 예수님이 유죄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은혜의 장소입니다. 그분은 심판받으셨고, 우리는 풀려났습니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상 가장 불공평한 재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가장 공의로운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분에게 전가되었고,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이 놀라운 교환 속에서,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결론

누가복음 23장 1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은 단지 한 분의 억울한 죽음을 기록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철저한 사랑과, 죄 없으신 예수님의 대속의 순종이 펼쳐지는 복음의 현장입니다. 진리 앞에 외면하는 빌라도, 조롱하는 헤롯, 침묵하는 군중, 외치는 폭도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무죄하신 분이 유죄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죄인은 풀려났습니다. 이 복음의 역설은 오늘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누구처럼 살아야 할까요? 빌라도처럼 중립을 가장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진리를 위해 침묵 속에서도 끝까지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라바처럼 은혜로 풀려난 자라면, 더 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나의 삶을 그분을 위해 드리는 것이 은혜에 합당한 삶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섭니다.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세상의 환호를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무거운 침묵 속에서도 진리이신 예수님을 붙들겠습니까? 무죄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복음 앞에 무릎 꿇는 이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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