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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44 - 23:56 묵상, 태양은 빛을 잃고

케리그마 2025.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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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희생, 그리고 침묵의 시작 – 십자가 위에서 열리는 안식

누가복음 23장 44절부터 56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의 순간을 조용하지만 깊이 있는 묘사로 전해줍니다. 세 시간 동안의 어둠, 성소 휘장의 찢어짐, 예수님의 마지막 외침, 그리고 신실한 자들의 침묵 속 헌신이 담긴 이 본문은, 복음의 클라이맥스이자 인류의 구원이 완성된 시간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이 단지 한 위대한 인물의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원의 절정이며, 모든 믿는 자들에게 참된 안식과 소망의 시작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어둠과 휘장 – 창조를 가리는 죽음, 성소를 여는 희생

본문은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며”라고 시작합니다(44절). 제육시는 유대 시간으로 낮 12시, 제구시는 오후 3시입니다. 정오부터 시작된 초자연적인 어둠은 단순한 기상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탄식의 상징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장자 심판 직전에 애굽에 어둠이 임했던 것처럼(출 10:21-23), 지금 십자가 위에는 창조주를 향한 세상의 죄가 정오의 햇빛을 가릴 만큼 무겁게 드리워진 것입니다.

이 어둠은 자연의 질서가 무너짐을 상징합니다. 세상이 가장 밝아야 할 시간에 어두워졌다는 것은, 가장 거룩하신 분께서 죄인이 되셨다는 복음의 역설을 드러냅니다. 이 어둠은 또한 모든 인류의 마음속 어둠을 상징하며, 예수님께서 그 모든 어두움을 홀로 짊어지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무게는 해조차 숨을 죽일 만큼 깊고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벌어진 또 하나의 사건은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진 것입니다(45절). 마태와 마가는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명시하지만, 누가는 ‘한가운데가 찢어졌다’고 표현하여 이 사건이 갖는 신학적 중심을 강조합니다.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던 장막이며,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인간이 함부로 나아갈 수 없음을 상징했습니다. 그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더 이상 대제사장의 중보 없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휘장은 헬라어로 "καταπέτασμα(katapetasma)"라고 하며, 성전의 가장 거룩한 경계를 뜻합니다. 이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던 그 경계가 예수님의 몸을 통해 찢어진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새로운 살 길로 비유하며, 그 찢기심이 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여셨음을 선포합니다(히 10:20). 죄로 인해 닫혔던 하나님의 임재가 십자가를 통해 다시 열렸습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마지막 호흡 – 순종의 완성

어둠 가운데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46절). 이는 시편 31편 5절의 인용이며, 유대인 어린이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 암송하던 기도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며,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죽음의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한 순종의 완성이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시 얻기 위함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요 10:17-1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강요당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이며,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의 희생이었습니다.

여기서 ‘부탁하다’는 헬라어 "παρατίθεμαι(paratithemai)"는 신탁하다, 맡기다, 위탁하다의 의미로,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기는 절대적 신뢰의 행위입니다. 그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 죽음의 문을 먼저 지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죽음이 두려움의 문이 아니라 영광의 문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외침 이후, 숨지시니라(46절). 누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숨을 거두시니라’라고 표현하며 고통의 절정 속에서도 주체적인 종말을 기록합니다. 이는 인간의 실패가 아니라, 구원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감동과 침묵 – 주님의 죽음 앞에서 벌어지는 반응들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백부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합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47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말하는 반면, 누가는 ‘의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무죄함과 고결함을 강조합니다. 로마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유대 신앙의 깊이를 이해하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무언가 초월적인 것을 느꼈습니다. 이는 복음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향한 것임을 보여주는 누가의 일관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며 모여든 무리들도 가슴을 치며 돌아갑니다(48절). ‘가슴을 친다’는 행위는 구약 성경에서 슬픔과 회개의 표현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백성들은 말없이 가슴을 치며 돌아갔습니다. 그들의 감정은 말보다 깊었고, 그 침묵 속에서 성령은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환호하던 군중이었지만, 이제는 가슴을 치며 죄의 깊이와 하나님의 뜻 앞에 눌린 백성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일을 지켜보던 이들과 갈릴리에서 따라온 여인들이 멀리 서 있었습니다(49절). 이들은 조용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들의 신실함은 예수님의 장례와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자격으로 이어집니다. 신앙은 때로 말보다 ‘곁에 있음’으로 증명됩니다. 말없이 곁에 선 이들의 사랑이, 주님의 무덤 곁에서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게 됩니다.

장례의 준비 – 신실함과 담대함의 만남

이제 누가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공회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50절). 그는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며, 공회가 결정한 일에 찬성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담대히 요청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하고, 정결한 세마포에 싸서 바위에 판 무덤에 모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시신을 공적인 수치 속에 방치하지 않고, 사랑과 정성으로 모시는 경건한 헌신의 행위였습니다.

요셉은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참된 제자의 전형입니다. 그는 신중하면서도 결단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면서 지금 행동하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범죄자처럼 다루었지만, 요셉은 그분을 의인으로 대하며 사랑으로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여인들은 그 뒤를 따라 무덤과 시신을 보는 일에 참여하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한 후 안식일에 계명을 따라 쉬었다고 기록됩니다(56절). 이 여인들은 십자가와 무덤, 장례와 안식일까지 예수님의 전 과정을 따라갔던 신실한 증인들입니다. 부활의 새벽은 이들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결론

누가복음 23장 44절부터 56절까지는 겉으로 보면 죽음과 슬픔, 침묵과 무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고, 새로운 시작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휘장은 찢어졌고, 마지막 호흡은 순종의 완성으로 드려졌으며, 그 죽음을 지켜본 자들은 가슴을 치며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며,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가슴을 치며 돌아가는 군중입니까, 곁에 서 있는 여인들입니까, 장례를 준비하는 요셉입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의 마지막 외침처럼 나의 삶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고백하며 마무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고백은 죽음의 끝이 아니라, 부활의 아침을 준비하는 가장 복된 시작입니다. 오늘도 그 십자가 앞에 조용히 엎드려, 그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매일성경 4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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