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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26 - 23:43 묵상,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

케리그마 2025.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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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길 위의 세 가지 시선 – 죄인을 위한 은혜의 약속

누가복음 23장 26절부터 43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시는 장면과, 두 강도 사이에 달리신 채로 한 죄인에게 천국을 약속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단지 육체적 고통을 넘어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구속의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 우는 여인들, 그리고 양쪽에 달린 죄수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고난에 반응합니다. 이들은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며, 동시에 복음의 깊이를 깨닫게 하는 증인들입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섭리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26절)고 본문은 말합니다. 구레네 시몬은 본래 예수님을 따르던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절기를 지키러 올라오던 유대 디아스포라 출신의 순례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처럼 보이는 순간에, 그는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여기서 ‘붙들어’라는 헬라어 "ἐπιλαμβάνομαι(epilambanomai)"는 강제로 붙잡아 무엇을 시키는 행동을 뜻합니다. 시몬은 원치 않았던 고난에 끌려 들어간 자였고, 그 십자가는 그의 계획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자가 됩니다. 누가는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akolouthein)를 명시하여, 단순히 뒤따른 것이 아니라 제자의 길을 걷는 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때로 시몬처럼 전혀 의도치 않은 삶의 무게, 고통의 십자가를 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우리를 예수님 뒤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억지로 시작된 순종이 은혜로 끝나며,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고난이 곧 소명이 되고, 십자가가 곧 제자의 길이 되는 역설의 복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울지 말고 회개하라 – 눈물이 아닌 돌이킴

예수님께서는 골고다로 향하시던 중,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슬피 울며 따르는 모습을 보십니다. 이에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절).

예수님은 이 여인들의 감정적 슬픔을 거절하지 않으시면서도, 그들의 눈물이 진정한 회개의 자리로 이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했고, 이제 그에 대한 심판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젖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29절). 이는 예루살렘 멸망의 날, 생명을 낳는 일이 오히려 고통의 근원이 될 정도로 참혹한 시대가 임할 것임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주님은 호세아서의 표현을 인용하시며(30절), 사람들이 산을 향해 ‘우리를 덮으라’ 하고 언덕을 향해 ‘우리를 가리우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두려움과 절망 속에 도망칠 곳조차 없어지는 절박한 심판의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31절) 하십니다. 푸른 나무, 곧 죄 없으신 예수님께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죄로 가득 찬 이 세상은 어떠하겠느냐는 경고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닌, 삶의 방향을 바꾸는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향한 감정적 동정으로 머물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 앞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울음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은 회개이며, 눈물보다 깊어야 할 것은 마음의 회복입니다.

옆자리에서 구원을 경험한 죄인 – 가장 가까운 복음의 증인

예수님은 마침내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한 사람은 오른편에, 한 사람은 왼편에(33절). 예수님의 십자가는 언제나 인간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그분은 한가운데 서시고, 양편에 있는 죄인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이는 인류 전체의 두 갈래 반응을 상징합니다.

한 죄수는 예수님을 향해 조롱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 이는 회개의 고백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이고 조롱 섞인 요구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이용하고 싶어했지, 그리스도 앞에 자신을 낮추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죄수는 이와 정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먼저 동료 죄인을 책망하며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40절). 그리고 이어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41절).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했고, 자신이 받는 벌이 정당하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향해 믿음의 고백을 드립니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무죄함을 인정한 유일한 증언자가 바로 이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문장을 덧붙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2절)

이 짧은 기도 속에는 놀라운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예수님 안에서 왕 되신 메시아를 보았고, 예수님의 나라가 죽음 이후에도 존재함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왕 앞에서 자신을 받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헬라어 원문에서 ‘진실로’는 "ἀμὴν(amen)"으로, 확정적인 약속의 선언입니다. ‘낙원’(παράδεισος, paradeisos)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안식을 누리는 구원의 장소를 가리킵니다.

이 약속은 은혜의 극치입니다. 회개의 기도 한마디에 천국이 약속됩니다. 고난의 마지막 순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았든지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구원의 확신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강도는 성경 공부도 하지 못했고, 선한 일을 할 기회도 없었지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자신을 그분께 맡겼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생명의 약속입니다.

결론

누가복음 23장 26절부터 43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에서 벌어진 한 편의 복음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원치 않았던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고,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눈물에서 회개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강도는 죽음 직전 믿음의 고백을 통해 천국을 약속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고난의 예수 앞에서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지만, 결국 복음의 진실을 증언하는 증인이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습니까? 억지로 진 십자가를 은혜로 바꾸고 있습니까? 단순한 감정이 아닌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의 나라를 소망하고 있습니까?

오늘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지길 바랍니다. 우리의 고난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눈물이 회개로 바뀌게 하시며, 우리의 입술이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도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음성을 듣는 은혜의 백성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매일성경 4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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