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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1 - 3:11 묵상, 배설물로 여기다

케리그마 2025.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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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물로 여긴 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의

할렐루야.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마음 활짝 열고 주의 음성 듣는 시간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본문은 빌립보서 3장 1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인생과 신앙 여정 전체를 통해 증언하는 고백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율법에 기반한 자기의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의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깨달을 수 있으며, 진정한 신앙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바울은 이 짧은 단락 안에 복음의 핵심, 곧 칭의와 성화, 영광에 이르는 소망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는 유대교적 배경 안에서 자라나 율법에 철저했던 자신의 과거를 ‘해로 여긴다’고 선언하며,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치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단지 한 인물의 영적 자서전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구속사의 여정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고, 경계하라 (빌립보서 3:1–2)

바울은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같은 말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립보서 3:1)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기뻐하라’는 동사 (χαίρετε, 카이레테)는 반복적이고 현재적인 명령형입니다. 이는 기쁨이 단지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의지적 선택이며, 특히 ‘주 안에서’만 가능한 영적 상태임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바울은 기쁨의 권면과 동시에 경계의 말씀을 줍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이를 삼가라”(빌립보서 3:2). 여기서 ‘삼가라’(βλέπετε, 블레페테)는 세 번 반복되며, 강한 경고의 어조를 띕니다. ‘개들’은 당시 유대 율법주의자들, 특히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며 율법 행위를 복음에 덧붙이려 했던 자들을 지칭합니다.

‘몸을 상해하는 자들’(κατατομὴν, 카타토멘)은 ‘할례’(περιτομὴ, 페리토메)를 조롱적으로 바꾸어 사용한 단어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의식적 할례가 오히려 참된 복음의 본질을 해치는 육체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단언합니다. 이 대조는 율법 중심의 의와, 성령 안에서의 자유를 강조하는 구속사적 긴장선 위에 서 있습니다.

 

참된 할례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빌립보서 3:3)

바울은 곧바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립보서 3:3). 여기서 ‘봉사하며’라는 단어는 헬라어 (λατρεύοντες, 라트뤼온테스)로, 제사장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종교적 봉사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진정한 예배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육체의 행위가 아닌 내면의 변화로 드려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구약의 상징이 신약의 실체 안에서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구약에서의 할례는 언약 백성의 표지였지만, 신약에서는 성령 안에서의 삶과 예배가 참된 언약 백성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할례 받은 자’이며, 복음을 훼손하려는 율법주의자들을 거짓된 ‘개들’이라 규정하는 것입니다.

 

배설물로 여긴 자기 의 (빌립보서 3:4–7)

바울은 이제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빌립보서 3:4). 바울은 자신이야말로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며,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서, 율법과 종교적 열심, 그리고 외적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음을 자랑처럼 나열합니다(빌립보서 3:5–6).

 

하지만 그는 곧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빌립보서 3:7). 여기서 ‘해로 여긴다’(ζημίαν, 제미안)는 단순한 손해가 아니라, 생명적 가치를 잃은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전까지 자랑이던 종교적 업적이 이제는 **그리스도 앞에서는 배설물(σκύβαλα, 스퀴발라)**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 ‘스퀴발라’는 고대 문헌에서 쓰레기, 오물, 쓸모없는 찌꺼기를 의미하며, 바울은 철저히 자기 의의 무가치함을 고백합니다. 이는 단지 겸손한 표현이 아니라, 율법적 의가 구원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며, 도리어 그리스도를 얻는 데 방해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복음의 핵심 선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최고 가치 (빌립보서 3:8–9)

바울은 자신의 고백을 한층 더 강화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립보서 3:8). 여기서 ‘고상하다’(ὑπερέχον, 휘페레콘)는 ‘비할 데 없이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바울에게는 이제 모든 가치 판단의 중심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리스도를 앎’(γνῶσις, 그노시스)은 단순한 인지가 아니라, 친밀하고 인격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17장 3절이 말하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립보서 3:8–9). 여기서 ‘발견되다’(εὑρεθῶ, 휴레쏘)는 수동태로,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의 안에서 인정받는 존재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립보서 3:9)는 말씀은 칭의 교리의 핵심 구절입니다.

 

구속사적으로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원리를 신약의 복음 안에서 완성된 형태로 다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도 의롭다함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의가 주어진다는 진리를 다시금 붙잡아야 합니다.

 

부활의 능력과 그 고난에 참여함 (빌립보서 3:10–11)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목표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립보서 3:10). 여기서 ‘알고자 한다’는 표현은 헬라어 (γνῶναι, 그노나이)로, 앞서 말한 ‘아는 지식’과 같은 어근을 사용한 능동적 갈망의 표현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ἀνάστασις, 아나스타시스)의 권능(δύναμις, 뒤나미스)을 체험하고자 합니다. 이는 미래적 부활을 넘어서, 현재의 삶에서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실존적으로 살아내려는 열망입니다. 그러나 이 능력은 고난의 참여(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를 통해서만 온전히 드러납니다.

부활의 권능에 대하여

빌립보서 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부활(ἀνάστασις, 아나스타시스)의 권능(δύναμις, 뒤나미스)’을 체험하는 삶은 단지 육체가 장차 살아날 것이라는 미래의 약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현재적 삶 전반에 작용하는 영적 실재이자 능동적 변화의 원천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여기서 '권능'(δύναμις)은 단순한 초자연적 힘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새 생명의 삶을 실천할 수 있는 내적 동력을 뜻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전반에서 이 부활의 능력이 실현된 삶의 모습을 곳곳에 보여줍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한 바울의 고백은, 부활의 권능이 자기중심적 본성과 세상적 가치관을 이긴 자의 전적인 삶의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 큰 가치로 여기며, 오직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삶을 최고의 삶으로 간주합니다.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활 신앙의 실천적 모습입니다.

또한 2장 12~13절에서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시고 그것을 행하게 하시는 부활적 동기부여와 실행 능력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구원을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부활의 능력을 통해 날마다 이루어가야 할 ‘현재형의 구속’으로 보고 있습니다. 구원은 끝난 사건이 아니라, 부활의 권능을 따라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성화의 여정입니다.

특히 2장 14~16절에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 없이 하라… 흠이 없고 순전하여…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내가 다름질도 헛되지 아니하였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하였음을 자랑하게 하려 함이라”는 표현은, 부활의 능력이 일상의 인내와 희생, 공동체 안의 빛된 삶으로 구체화되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이는 내면의 변화만이 아니라, 외적 관계와 행동에까지 확장된 부활 생명의 증거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모든 사역과 심지어 죽음조차도,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드리는 '전제'(σπένδομαι, 스펜도마이)로 여깁니다(2:17). 이는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완전히 하나님의 제단 위에 내어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표현입니다.

결국 바울에게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는 삶이란, 과거의 종교적 자랑과 인간적 의를 ‘배설물’(σκύβαλα, 스퀴발라)로 여기는 철저한 자기부정에서 시작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참된 의, 고난에 동참하는 용기, 그리고 마침내 죽음을 이겨낼 믿음의 승리를 향해 기꺼이 자신을 비워내는 삶의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은 단지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이상적인 헌신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를 향한 권면이자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부활절에 회상하는 교리적 사건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죽은 자처럼 살아가려는 옛 사람을 깨뜨리고,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실제적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는 자는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고(1:29), 손해를 유익보다 귀히 여기며(3:7), 자기 삶을 복음의 전제물로 드리며, 끝내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 길이 곧 믿음의 길이요, 부활의 능력이 실현되는 거룩한 여정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립보서 3:11)라며, 부활에 이르는 길이 곧 십자가의 길임을 인식합니다. 여기서 ‘이르려 하노니’(καταντήσω, 카탄테쏘)는 ‘도달하다, 이르다’는 의미로, 부활은 단지 믿음의 보상이 아니라, 현재의 고난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여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결론 정리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한 빌립보서 3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은, 복음이 무엇이며,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적 자랑과 자기 의를 철저히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분의 부활과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자신의 영적 여정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네 가지 영적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복음 안에서만 참된 기쁨이 있고, 외적 행위에 매이지 않는 자유가 있습니다.
둘째, 인간의 의는 아무리 완전해 보여도, 그리스도 앞에서는 배설물과 같습니다.
셋째, 참된 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넷째, 부활의 능력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고난에도 동참해야 합니다.

오늘도 이 길을 함께 걷는 여러분,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 발견되기를 갈망하며, 이 믿음의 여정을 끝까지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매일성경 5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매일 말씀 묵상을 통해 은혜로운 5월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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