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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3:1–10 강해 설교

케리그마 2025.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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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권세 아래 숨겨진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며 감사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동안 이 세상의 정체와 흐름을 말씀으로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밝히 드러내는 영적 통찰입니다. 하나님은 혼돈 가운데서도 그 백성을 인도하시며, 모든 권세 위에 계시는 분이심을 기억합시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정체(요한계시록 13:1-2)

요한은 말씀 가운데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보았다고 기록합니다(13:1). 여기서 '바다'(θάλασσα, thalassa)는 고대 세계관에서 혼돈과 악의 근원으로 상징되는 공간입니다. 이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오며, 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반하는 권세가 세상 속에서 드러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짐승은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며, 그 뿔들에는 열 개의 면류관(διάδημα, diadēma)이 있었습니다(13:1). 또 머리들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었고, 짐승의 모습은 표범과 같고, 발은 곰의 발 같고, 입은 사자의 입 같다고 하였습니다(13:2). 이 표현은 다니엘서 7장의 네 짐승을 종합한 이미지로, 역사 속 제국들의 폭압적이고 우상적인 권세를 상징합니다.

다니엘서에서 각각의 짐승이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제국을 가리켰다면, 요한계시록의 이 짐승은 그 제국들의 성격을 하나로 응축하여 표현한, 궁극적 반(反)그리스도의 정치적 세력입니다. 그리고 이 짐승은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13:2)라고 했습니다. 즉, 사탄(용)이 세상 권력 뒤에서 짐승을 조종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모방하여 자신도 왕권과 권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그 권세는 본질적으로 거짓이며, 멸망으로 향하는 권세입니다.

치명적인 상처와 그 후의 경배(요한계시록 13:3-4)

요한은 이 짐승의 머리 하나가 "죽게 된 상처를 입은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더라"고 말합니다(13:3). 여기서 '죽게 된 상처'(ἐσφαγμένον, esphagmenon)는 그리스도께서 희생당하신 양으로 묘사될 때 사용된 단어와 동일합니다(계 5:6). 이 짐승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모방하여, 마치 부활한 것처럼 가장합니다. 거짓된 죽음과 거짓된 부활입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용, 곧 사탄을 경배하고 짐승도 경배합니다. 이들은 말합니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겠느냐?"(13:4). 이 질문은 본래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드린 고백입니다(시 35:10).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짐승, 즉 반(反)하나님 권세를 경배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을 모방하고, 거짓 권세를 통해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오늘날도 이 세상의 시스템과 구조 속에 이런 모방된 권세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힘에 경배하고, 언론과 정치, 경제의 거대한 흐름에 무릎 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권세에서 나온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짐승을 따르게 됩니다.

입을 벌려 하나님을 모독하다(요한계시록 13:5-6)

말씀은 짐승이 "큰 말과 모독하는 말"을 하며 활동할 권세를 받았다고 전합니다. 이 권세는 "마흔두 달 동안" 허락됩니다(13:5). 이 기간은 요한계시록에서 자주 등장하는 환난의 상징적 기간입니다(계 11:2, 12:6). 이 숫자는 교회가 세상 가운데 고난받는 시간을 의미하며, 한정된 기간임을 암시합니다.

짐승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비방"합니다(13:6). 여기서 '비방하다'(βλασφημέω, blasphēmeō)는 단순한 험담이 아니라, 고의적이고 지속적인 신성모독을 의미합니다. 짐승은 하나님 그 자체만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까지 모독합니다. 세상의 권세는 끊임없이 복음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시하며, 신앙을 조롱합니다. 우리는 이런 흐름을 잘 discern, 즉 분별해야 합니다. 단순한 문화 현상이나 정치적 유행으로 여겨지는 것들 속에 이 짐승의 비방이 숨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들을 이기는 권세와 인내의 필요(요한계시록 13:7-10)

이제 본문은 짐승이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고 말합니다(13:7). 여기서 '이기게 되다'(νικᾶν, nikaō)는 전쟁의 승리를 의미하는데,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사망을 이기실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단어가 짐승에게 쓰인다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이 땅에서는 패배하고 죽임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조롱당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가 받아들여야 할 구속사적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일시적이며, 참된 승리는 여전히 어린 양에게 있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농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13:8)고 선언합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짐승을 경배하지만,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생명책은 단순한 출석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의 명단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13:9). 이는 복음서와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할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 듣는 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짐승의 세력에 휘말려 넘어가지 않으려면, 우리는 귀를 열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3:10). 여기서 우리는 구속사적으로, 신자의 현실을 재해석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존재입니다. 잠시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고, 우리의 인내와 믿음은 반드시 보상받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구원의 확신과 최종 승리에 대한 선언입니다. 성도는 끝까지 견뎌야 하며, 그 인내는 패배의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능동적 믿음의 자세입니다.

결론 정리

사랑하는 여러분, 요한계시록 13장은 무서운 짐승의 권세를 통해 사탄의 통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짐승의 권세는 한정되어 있고, 그 배후에는 이미 하늘에서 패배한 용, 곧 사탄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흐름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말씀을 붙들어야 하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인내하십시오. 믿음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짐승처럼 보이는 이 세상의 권세를 분별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끝까지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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