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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4:14–20 강해설교

케리그마 2025.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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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성도 여러분, 추수하실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때가 찼고, 곡식은 익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광의 나라로 거두실 때가 도래했습니다. 그분은 지체하지 않으시며, 모든 불의와 악을 낱낱이 심판하시고, 주님의 밀알들을 영원한 곳간으로 들이십니다. 감사하십시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추수의 때가 찼도다 (요한계시록 14: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계시록 14장 14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은 장엄하면서도 깊은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종말의 추수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수확보다도 엄숙하며,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자비가 동시에 실현되는 결산의 시간입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 인자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14:14). 이 장면에서 요한은 구름 위에 앉으신 ‘인자 같은 이’(ὅμοιος υἱὸς ἀνθρώπου, homoios huios anthrōpou)를 봅니다. 이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다니엘서 7장 13절의 환상을 배경으로 하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권세를 받으시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구름’은 신적 현현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그분이 ‘머리에 금 면류관’(στέφανος, stephanos)을 쓰셨다는 것은 왕으로서의 권세와 구속의 승리를 함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분의 손에는 ‘예리한 낫’(δρέπανον, drepanon)이 들려 있습니다. 낫은 심판의 도구이며, 추수할 때가 이르렀음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는 농부이자 심판자이십니다. 이 두 역할은 분리되지 않고, 종말론적 성취 안에서 결합되어 나타납니다. 주님은 곡식이 다 자랄 때까지 기다리셨고, 이제는 거두실 준비가 되셨습니다. 그분의 눈에는 혼란과 악으로 가득한 세상이 보이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신실하게 자라난 성도들의 곡식도 보이시는 것입니다.

천사의 음성과 추수의 칼날 (요한계시록 14:15–16)

이어지는 장면에서 또 다른 천사가 하늘 성전에서 나와 큰 음성으로 외칩니다.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14:15). 여기서 ‘다 익었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ξηραίνω’(xērainō), 즉 완전히 무르익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속에서 결코 빠르지도, 결코 늦지도 않게 정해진 그 때, ‘카이로스’(καιρός)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 명령에 따라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14:16). 이 단순한 한 문장은 영적 의미로는 엄청난 결실의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 앞에 어떠한 저항도 없고, 지체도 없습니다. 성도들이 인내와 눈물로 믿음을 지켜낸 그 열매들이 하나님의 창고로 들려지는 영광의 순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헛되이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수고와 고난 속 순종은 반드시 기억되며,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어지게 됩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의 추수 대상이 되어, 그 낫 아래에서 영원한 곳간으로 옮겨질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진노의 포도밭, 두 번째 추수 (요한계시록 14:17–19)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또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 나옵니다. 그는 역시 ‘예리한 낫’을 가지고 있으며, 이 장면은 앞선 수확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추수를 나타냅니다 (14:17). 곧 이어 불을 다스리는 또 하나의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큰 음성으로 말합니다.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14:18).

여기서 포도는 달콤한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심판의 대상입니다. ‘익었다’는 표현은 앞서 곡식이 익은 것과는 다른 헬라어 ‘ἠκμάσθη’(ēkmasthe), 즉 부패하기 직전의 상태로서, 죄악이 관영한 절정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 짐승의 표를 받고 세상의 권세에 동화된 자들입니다.

천사는 그 포도송이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 틀에 던지니’ (14:19), 이는 가장 무시무시한 심판의 이미지로, 포도 틀은 사람의 발에 밟혀 즙이 터져 나오는 모습에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감정적 폭발이 아니라, 거룩함의 본질에서 나오는 정당한 심판입니다. 이 포도 틀은 하나님의 공의가 집행되는 장소이며, 회개의 여지가 사라진 영원한 저주의 터전입니다.

피의 흐름과 하나님의 공의 (요한계시록 14:20)

마지막 절은 우리가 숨을 멎고 읽게 되는 장면입니다. “그 틀 밟는 곳이 성 밖에 있으매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타디온에 퍼졌더라” (14:20). 여기서 ‘성 밖’은 구속의 공간이 아닌 심판의 장소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 밖에서 고난당하셨지만, 이 장면은 그 구속을 거부한 자들이 받는 최종 심판의 그림자입니다.

‘피가 말 굴레까지 닿았고’(ἕως τῶν χαλινῶν τῶν ἵππων, heōs tōn chalinōn tōn hippon)는 종말의 날, 심판의 무게와 깊이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천육백 스타디온’(σταδίων, stadion)은 당시 이스라엘의 전 영토에 해당하는 거리로, 심판이 특정 지역이 아니라 전 지구적이고 포괄적임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단지 문자적인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우주적 차원에서 완전하게 실현된다는 뜻입니다. 악인은 피할 곳이 없으며,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그 심판 앞에서 무력하게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는 정의의 강물이며, 거기에는 위선이나 자기의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결론 정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계시록 14장 14절부터 20절까지의 본문은 두 가지 추수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생명의 추수이며, 하나는 심판의 포도입니다. 이 두 추수는 인류 역사와 우리의 개인적 삶 속에서도 언제나 병행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구름 위에서 낫을 드신 채, 그 때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어떤 이는 은혜의 곡식으로, 어떤 이는 진노의 포도로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어떤 열매로 익어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낫에 거두어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다 익은 곡식’처럼, 은혜의 시간 안에서 충만한 순종으로 자라나기를 축복합니다. 동시에 아직 회개하지 않은 영역이 있다면, 주님의 포도 틀로 던져지기 전에 회개의 눈물로 돌아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거두시는 분이시며, 그 날은 언제나 생각보다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실히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 안에서 익어가십시오. 주님의 낫이 여러분을 생명의 곳간으로 옮기시는 그날, 우리는 함께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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