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요한복음 11:17-35 묵상 및 설교

케리그마 2025. 2. 9.
반응형

제목: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1:17-35는 나사로가 죽은 후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여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나고 그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을 예고하시며,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선언하십니다. 또한 마리아와 함께 슬퍼하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인간적 감정과 깊은 연민을 드러내십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죽음조차 이기는 생명의 주이심을 선포하며,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신뢰하도록 가르칩니다. 가장 위대한 기적을 행하셨지만 가장 많은 대적자를 만들어낸 기이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자,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만인 앞에 드러난 주님의 신성과 뒤틀려진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을 봅시다.

나사로의 죽음과 예수님의 도착 (요 11:17-20)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요 11:17).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죽은 자의 영혼은 사흘 동안 시신 근처에 머무르다가 이후에 떠난다고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나사로가 나흘째 되는 날까지 무덤에 있다는 것은 그가 완전히 죽었고 부활의 가능성이 없다는 절망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시점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함께 있었습니다(요 11:19). 예수님은 이 절망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십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나아가 맞이하지만, 마리아는 집에 머물러 있습니다(요 11:20). 이는 두 자매의 서로 다른 성격과 감정적 반응을 보여줍니다.

 

1900년대 그려진 베다니의 모습

 

  • 베다니(Bethany, Βηθανία)는 히브리어 및 아람어 "בֵּית־עַנְיָה"에서 유래합니다. "베이트(בֵּית)"는 '집(House)'을, "아니(עני)"는 '가난한 자(Poor)'를 의미하여 "가난한 자들의 집(House of the Poor)"로 해석됩니다. 일부 학자들은 "고난의 집(House of Suffering)"으로 보기도 하며, 나사로의 부활(요 11장)과 같은 사건들이 이를 지지합니다. 또 다른 견해로는 지역의 특성상 "무화과의 집(House of Figs)"일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장소로서, 신앙 공동체가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영적 안식처의 상징이 됩니다. 전해진 전설로는 베다니에는 나병환자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수입도 거의 없었던 그들은 무화과를 심어 재배하며 살았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베다니에 대한 지리적 고찰은 후에 더 깊이 다루겠습니다.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 (요 11:21-27)

마르다는 예수님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동시에 죽음 앞에서의 인간적인 절망을 드러낸 말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생명을 치유할 능력이 있으셨다고 믿었지만, 이미 죽은 나사로에 대해서는 소망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이어서 “지금이라도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압니다”(요 11:22)라고 고백하며, 예수님께 대한 신뢰를 나타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요 11:23)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이 말을 마지막 날의 부활로 이해하며 즉각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요 11:24).

 

예수님은 자신이 단순히 부활을 약속하는 자가 아니라, 부활과 생명의 근원이심을 선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과 구속 사역을 나타내는 중요한 선언입니다. 이에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요 11:27)라고 고백하며 믿음을 확증합니다.

 

마리아의 슬픔과 예수님의 공감 (요 11:28-33)

마르다는 집으로 돌아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오셨다고 전합니다. 마리아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가며, 많은 유대인들도 그녀를 따라갑니다(요 11:29-31).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32)라고 말하며 깊은 슬픔을 드러냅니다. 이는 마르다와 동일한 고백이지만, 마리아의 반응은 더욱 감정적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함께 슬퍼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시고 깊이 감동하시며 심령에 비통함을 느끼십니다(요 11:33). 여기서 사용된 ‘비통함’과 ‘감동함’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초월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아픔에 깊이 연대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의 눈물과 인간적인 연민 (요 11:34-35)

예수님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요 11:34)고 물으시며 나사로의 무덤으로 향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요 11:35). 이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인간적 감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로, 예수님이 우리 고통 속에 함께하시며 슬퍼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단순히 나사로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이 겪는 죽음과 고통의 현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슬픔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기 위해 오셨으며,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결론 -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라

요한복음 11:17-35는 죽음 앞에서의 인간적 절망과 슬픔 속에서도 예수님이 어떻게 생명의 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자신의 신성과 구속 사역을 증명하시며,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고난과 슬픔의 순간에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시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삶] 2025년 2월 묵상 본문입니다.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