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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10 - 4:23

케리그마 2025.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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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의 신비와 넘치는 공급의 은혜

벌써 빌립보서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말씀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빌립보서 4장 10절부터 23절까지입니다. 이는 바울 서신의 마지막 인사로 구성되어 있지만, 단순한 작별 인사를 넘어서, 복음 안에서의 동역, 자족의 비밀,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 그리고 복음 공동체의 교제를 깊이 있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필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결코 물질 중심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나눔과 자족, 그리고 구속사의 실제적 실현을 아름답게 풀어냅니다.

 

이 본문은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깊이 영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물질적 지원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면서, 그것이 단지 필요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열매로 맺힌 의의 헌금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제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자족이란 무엇인지, 공급이란 누구로부터 오는지, 그리고 복음 안에서의 나눔이 갖는 영원한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기뻐하되 의존하지 않는 감사 (빌립보서 4:10)

바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빌립보서 4:10). 여기서 ‘싹이 남’(ἀνεθάλετε, 아네탈레테)은 봄철에 죽은 줄 알았던 식물이 다시 피어나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지원이 끊겼다가 다시 시작된 것을 자연스러운 생명의 순환처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후원이 단절된 것에 대해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회가 없었다’고 하며 그들의 중심을 이해합니다. 그는 후원 자체보다는, 후원 뒤에 있는 마음의 회복과 복음적 연대의 부활에 더 큰 기쁨을 느낍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감사는 주는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각과 연합이 살아있는 것에 있습니다.

이 구절은 바울의 감사가 단지 물질적 필요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는 후원을 받고 기뻐하지만, 기쁨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 성도 간의 영적 연합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자족을 배운 사람의 고백 (빌립보서 4:11–13)

바울은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이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립보서 4:11). 여기서 ‘자족’은 헬라어 (αὐτάρκης, 아우타르케스)로, '자기 안에 충분함이 있는 상태', 즉 외적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내적 평형 상태를 의미합니다. 고대 철학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단어이지만, 바울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으로 재정의합니다.

 

그는 이어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립보서 4:12)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비결을 배웠노라’는 표현은 헬라어 (μύημαι, 뮈에마이)로, 본래 비밀 결사에서 훈련받은 자가 통과 의식을 거쳐 ‘비밀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이 훈련을 통해, 고난과 풍요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는 깊은 신앙의 고백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는 절정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이 구절의 ‘능력 주시는 자’(ἐνδυναμοῦντι, 엔뒤나문티)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지속적인 내적 능력을 가리키며, 단순한 자기 계발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지속적 권능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는 초인의 능력이라기보다, 주어진 어떤 형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복음을 따르는 능력을 말합니다.

 

나눔의 제사, 열매 맺는 동역 (빌립보서 4:14–18)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지원을 단순한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향기로운 제물, 곧 예배적 행위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립보서 4:14). 여기서 ‘참여하였다’(συγκοινωνήσαντες, 쉼코이노네산테스)는 단순히 도운 것이 아니라, 고난에 함께 동참한 자로서의 영적 연대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단지 돈을 보낸 것이 아니라, 바울의 사역에 함께 짐을 짊어진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헌금에 대해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았으니 이는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립보서 4:18)고 표현합니다. ‘향기로운 제물’(ὀσμὴν εὐωδίας, 오스멘 에우오디아스)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희생제사, 특히 번제나 화목제에서 쓰이던 용어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헌신은 단지 사람의 필요를 채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신령한 제사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구속사적 해석은 교회가 행하는 물질적 나눔이 결코 세속적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적 예배의 한 형태임을 우리에게 깨닫게 합니다. 성도의 헌신은 언제나 예배의 연장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씨앗이 됩니다.

 

향기로운 제물이란 무엇인가?

빌립보서 4장 18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헌금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는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여기에서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ὀσμὴν εὐωδίας(오스멘 에우오디아스)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구약의 제사 제도에 깊이 뿌리내린 신학적 상징어로서, 복음 안에서 성취된 제사의 영적 의미를 풍성히 드러냅니다.

 

먼저, 이 단어는 구약의 희생제사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표현입니다. 창세기 8장 21절에서 노아가 홍수 후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을 때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개역개정)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그 향기’는 히브리어로 ‘레아흐 니호아흐’, 곧 ‘기쁜 냄새’, ‘받아들일만한 향기’라는 뜻이며, 이는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셨다는 언약적 기쁨과 화해의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레위기 1장, 2장, 3장 등 제사 규례에서도 반복되며, 번제나 소제,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뻐 받으셨다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신약에서 이 구약적 개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완성됩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드리셨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온전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셨고, 이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삶과 헌신, 나눔을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제사로 변화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8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헌금을 단지 ‘후원’이나 ‘도움’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구약 제사의 언어로 재해석하여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이는 바울의 물질관이 단지 실용적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로서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빌립보 교회의 헌신은 단순한 친목이나 우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적 행위, 곧 구속사 안에서의 예배였던 것입니다.

 

특히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표현은 제사의 형식보다 그 내면의 태도와 동기,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성을 강조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는 상황에서도 지속적으로 후원했고, 이는 그들의 신앙이 단지 말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물질로, 시간과 삶으로 표현된 것이었습니다. 이 나눔은 하나님 앞에서 희생과 헌신의 고귀한 예배로 전환되었고, 그 향기는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었다는 신학적 선언이 바로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이 제사를 통해 교회와 사도의 관계, 곧 복음 공동체의 사귐이 예배 그 자체임을 보여줍니다.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전달된 물질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교(koinonia), 곧 복음 안에서 함께 고난받고 동역하는 제사장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히 드러났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ὀσμὴν εὐωδίας(오스멘 에우오디아스),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이 표현은 구약 제사의 ‘제단 위의 향기’에서 시작되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고, 오늘날에는 성도의 실제적 삶의 헌신과 나눔, 그리고 예배로 승화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행위로 확장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나눔이 때로는 작고 연약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복음 안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배가 되며,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제사가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는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 (빌립보서 4:19–20)

이제 바울은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립보서 4:19). 여기서 ‘채우시리라’(πληρώσει, 플레로세이)는 ‘가득 채워 넘치게 하다’는 의미를 가진 약속의 동사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필요가 채워졌다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운 성도들의 필요를 하늘의 방식으로 채우실 것이라고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이 공급은 단지 물질적 보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라는 말은, 하늘의 자원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공급하신다는 구속사적 축복입니다. 즉, 우리가 나눔을 베풀 때, 하나님은 우리를 가난하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나눔을 통해 우리의 삶을 더 깊은 은혜로 채우시는 분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빌립보서 4:20)이라고 영광의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모든 공급과 자족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절의 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신학적 묵상

빌립보서 4장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말씀은 바울의 심오한 신앙 고백이자,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성경신학적 정수가 담긴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필요를 채우신다’는 일반적인 약속을 넘어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성품과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은혜의 충만함을 선언하는 찬양입니다.
본문에서 ‘채우시리라’는 헬라어 동사는 πληρώσει(플레로세이)입니다. 이 단어는 기본형 πληρόω(플레로오)에서 파생되었으며, '가득 채우다, 완성하다, 충만케 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단순히 비어 있는 그릇에 물을 붓는 행위를 넘어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대로 어떤 것을 완전히 성취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사역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시는 언약적 충만함을 말합니다.

또한 바울은 이 공급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엔 크리스토 이예수)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모든 충만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2장 9절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모든 사역은 그리스도라는 구속사의 중심 안에서만 가능하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공급이 흐르는 유일한 통로이자 원천이십니다.

그 공급의 기준은 “그 풍성한 대로”(κατὰ τὸ πλοῦτος αὐτοῦ, 카타 토 플루토스 아우투), 곧 하나님의 ‘부요함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풍성함’(πλοῦτος, 플루토스)은 물질적 자산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 은혜, 능력, 지혜, 선하심 등 전 존재의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부족함 없는 본질에서, 제한 없는 자원에서 우리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이 표현은 ‘너희 형편에 따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함에 따라’라는 점에서, 우리가 받을 복이 우리의 공로나 형편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해 있음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영광 가운데”(ἐν δόξῃ, 엔 독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채우심은 그분의 영광의 맥락 속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공급은 단지 생존이나 편안함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수단이며,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삶에 은혜가 흘러들어오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채움을 받는 이유는 그 안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분을 예배하게 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물질을 공급했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의 쓸 것을 채우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공급은 단지 인간의 주고받음의 균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 안에서 주어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응답임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섬길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 섬김의 현장에 자신의 이름으로 응답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립보서 4장 19절은 우리 삶에 진정한 믿음의 확신을 줍니다. 하나님의 채우심은 제한된 계산이 아닌, 하나님의 풍성함과 그리스도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사적 공급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충만하게 채움받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공동체의 끝맺음, 은혜의 인사 (빌립보서 4:21–23)

바울은 마지막 인사를 전하며,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며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빌립보서 4:22)라고 말합니다. 이는 로마 제국의 중심부, 곧 황제의 가문이나 행정 체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생겨났다는 복음 확장의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빌립보서 4:23)라고 축복합니다. ‘은혜’(χάρις, 카리스)는 이 서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도, 바울이 감당한 사역도, 빌립보 교회의 동역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심령에 있을 때, 우리는 자족할 수 있고, 나눌 수 있으며, 고난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상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게 합니다.

 

결론 정리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한 빌립보서 4장 10절부터 23절까지는 단지 바울의 감사 인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붙잡힌 자의 삶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자족과 나눔, 공급과 찬양으로 살아나는지를 보여주는 구속사적 증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음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성도의 자족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배운 은혜의 능력입니다.
둘째, 헌신과 나눔은 단순한 도움을 넘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셋째, 우리의 필요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 가운데 채우십니다.
넷째, 복음의 확장은 우리를 통해 로마의 궁전까지도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은혜는 우리의 심령을 지배할 때, 기쁨과 평안을 넘치게 합니다.

이제 우리도 바울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 은혜 안에 머물고, 자족의 신비를 배우며, 복음의 동역자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매일성경 5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매일 말씀 묵상을 통해 은혜로운 5월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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