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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6:4 - 6:13 묵상,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케리그마 2025.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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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회복, 다시 빛나는 신부

아가서 6장 4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은 이전 장에서 잠시 멀어졌던 신부가 다시금 신랑의 눈에 사랑스럽게 회복되어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신랑 되신 주님의 시선 안에 회복된 교회, 곧 신부의 아름다움을 향한 감탄으로 가득하며, 그 찬사가 구속사의 회복과 연결되어 더 깊은 의미를 이룹니다. 멀어짐 속에서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깊어져서 다시 맞이하는 기쁨으로 나타나는 이 장면은, 우리의 신앙이 반복되는 연약 속에서도 결국 은혜로 회복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의 회복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아가 6:4)

신랑은 다시 신부를 바라봅니다. 여기서 사용된 “디르사”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옛 수도로서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졌으며,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성읍으로, 그 영광과 중심성을 상징합니다. 신부를 이 두 도시에 비유한다는 것은 그녀의 회복이 단순한 용서 그 이상임을 의미합니다. 신랑은 신부가 다시금 영광스럽게 서 있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었을 때 받는 정체성과 자존의 회복을 보여줍니다.

또한 신부를 “깃발을 세운 군대”라고 표현한 것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찬사입니다. 히브리어 ‘נִרְאָה כַּנִּדְגָּלוֹת(니르에 카닌드갈롯)’은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위엄과 질서, 기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아름다움을 넘어서, 신부가 영적 권위와 힘을 지닌 존재로 인식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 안에서 회복된 자는 단지 부끄럼 없는 존재로 회복되는 것을 넘어서, 능력과 권세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 사랑은 눈에 나타납니다.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의 과장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 속에 담긴 깊은 감격입니다. 우리가 회복되어 다시 주님을 바라볼 때, 그 시선 하나만으로도 주님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신앙의 회복은 그분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기적입니다.

그분께 속한 자의 고백

“왕비가 육십이요 후궁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아가 6:8~9)

이 장면은 선택과 구별의 언어로 가득합니다. ‘왕비’, ‘후궁’, ‘시녀’가 수적으로 많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화려함과 다양함을 상징할 수 있지만, 신랑의 눈에는 오직 하나, ‘완전한 자’가 보일 뿐입니다. ‘완전한 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תַּמָּתִי(탐마티)”이며, 이는 흠이 없는 순결함을 나타내는 말로, 단지 도덕적 완전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지켜낸 사랑의 순수함을 뜻합니다.

그녀는 ‘비둘기’입니다. 다시금 그 순결함의 상징이 강조됩니다. 많은 이들 가운데 특별한 하나,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민족과 족속 가운데 교회를 택하셨고, 또 그 교회 안에서도 각 성도를 부르시며 ‘너는 내 것이라’ 하신 그 선택의 은혜를 이 구절이 노래합니다.

그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명확하게 보입니다. “딸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며, 왕비들과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이것은 신부의 회복이 단지 내면의 만족에서 그치지 않고, 공동체와 세상 속에서도 존귀하게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회복의 열매를 맺게 하며, 그 회복은 결국 다른 이들에게도 영적 감화를 줍니다. 진짜 사랑은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흘러넘치며 전해지게 됩니다.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여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여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아가 6:13)

마지막 절에 등장하는 ‘술람미’라는 표현은 이 본문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명칭입니다. ‘술람미’는 히브리어로 ‘שלומית(슐로밋)’에서 유래된 것으로, ‘평화의 사람’, 또는 ‘평화로운 자’를 의미합니다. 이는 ‘샬롬’과 어원이 같아, 신부가 평화의 자리, 곧 주님의 안식 안에 있는 자로 회복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그녀를 부릅니다. “돌아오라!” 이 외침은 단순한 구경의 욕망이 아닙니다. 술람미 여인의 모습은 회복된 성도의 모습이며, 그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돌아오라’는 복음의 부르심이 됩니다. 이는 곧, 교회가 세상 가운데 진정한 정체성을 회복할 때, 세상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발견하게 된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단지 술람미 여자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모든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에 신랑은 묻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이는 단순한 구경꾼의 시선을 경계하는 표현입니다. ‘마하나임’은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만난 장소이며,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신랑은 술람미 여인의 회복과 춤이 단지 볼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도의 회복은 공연이 아니라, 예배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회복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한 번 멀어졌다고 식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주님을 잠시 놓칠 수 있지만,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시며, 다시 손을 내미시며,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그분의 시선 안에 설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다.” 우리가 보기엔 상처투성이 같아도, 주님은 회복된 우리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보십니다.

우리의 이름은 술람미입니다. 평화의 사람, 주님의 품에 안긴 자. 주님의 눈에 하나뿐인 자입니다. 오늘도 그 시선 앞에 서십시오. 세상이 아무리 소리쳐도, 주님의 사랑 앞에서만 진짜 내가 회복됩니다. 주님이 부르십니다.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자.” 이제 그 사랑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평화 가운데 머무십시오. 당신은 주님의 사랑하는 신부입니다.


매일성경 4월 본문입니다. 일별 묵상 본문을 클릭하시면 각 본문에 따라 묵상을 따라 설교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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